몇 년 전부터 두피가 간질거렸다. 가끔씩 그랬는데 요즘 특히 심하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을 보다가 정수리에 삐죽이 솟아 나오는 흰 머리카락을 보게 되었다. 그 양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화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흰머리를 보거나 눈이 침침해지는 순간과 마주하면 낯설다.
내 안의 감정과 생각은 모두 예전과 다르지 않은 듯한데, 하물며 사춘기 시절 까불대던 장난기도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데. 어쩌자고 외양만 고스란히 세월의 흐름을 감당해야 하는 건지 아주 조금 억울하게 생각될 때도 있다. 겉이 낡아지는 것만큼 감정도 그에 발맞춰 퇴색된다면 사는 게 더 쉬워질까, 아니면 더 어려워질까.
엄마와 돌아가신 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늘 젊어 보였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동안이었다. 게다가 두 분 다 흰머리가 늦게 난 편이었다. 엄마는 예순이 넘어서도 흰 머리카락 개수가 몇 개 되지 않아 족집게로 늘 뽑아내셨다.
2년전. 81세때 엄마의 머리에는 검은 머리카락도 꽤 많았다.
그 유전자의 영향인지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50대 중반임에도 흰머리가 없다. 정작 막냇동생인 나는 50세를 기점으로 흰머리가 늘어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두 언니는 막내가 머리 밑이 간지럽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간지러운지, 정수리에 있는 흰머리를 뽑아낼 때 하도 눈을 치켜떠서 이마에 잔주름이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와 큰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은 소파에 앉은 후 나를 바닥에 앉힌다. 그래야 높은 곳에서 내 머리 꼭대기를 잘 내려다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둘이 서로 내 흰머리를 뽑겠다며 성화다. 엄마는 돋보기까지 끼고 내 흰머리를 뽑아 주신다. 그때마다 엄마는 속상해하며 장탄식을 늘어놓으신다.
"막내가 흰머리가 있으면 어떡하노?"
"헉. 엄마. 막내라도 나이가 오십이 넘었쪄요."
"세상에 우리 막내가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나?"
본인 나이 드는 건 안중에 없고 막내딸 흰머리 생기는 것만 안타까운 엄마는 뽑다가 눈이 시큰 거리면 큰언니에게 족집게를 넘기신다. 그러면서 꼭 "까만 거 뽑지 말고 흰 거만 뽑아라."라고 당연한 말씀을 연거푸 하신다. 그러면 큰언니는 '자기를 바보로 아는 거냐'며 투덜거린다. 큰언니는 내 흰머리 뽑는 게 재미있는지 지치지도 않고 뽑아내며 완벽히 처리해 주고 돌아간다. 다음에 큰언니가 흰머리가 생기면 내가 족집게 들고 가서 뽑아 줄 날이 있을 거다.
내 흰머리가 아직은 뽑는 수준에서 그치지만 언젠가 염색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이 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기어코 내 흰머리를 다 뽑아내시는 건 자연스러운 건가???? 알다가도 모를 엄마 마음)
엄마의 머리가 전체적으로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한 지 이제 십여 년쯤 된 듯하다. 한 번도 염색하지 않은 채 흰머리를 고수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너무 급격히 일시에 변해버리는 게 아니라면 근 20년 동안 멋내기 염색 한 번도 안 하고 버텨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너무 하얘져 버리면 바로 염색할 마음도 있음)
엄마도 흰머리가 나기 시작할 당시에는 머리 밑이 참 많이 간지러우셨을 거다. 내가 겪어보니까 그 간지러움의 정도를 알겠다. 늙는다는 건, 늙으신 엄마를 이해할 거리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는 것과 같다. 엄마의 딸에서 엄마의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