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준비를 할 때면 마음이 분주하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음식을 하거나 주방에 서 있을 때면 늘 작아지곤 한다. 여전히 살림이 손에 착착 붙는 맛이 나지 않는다. 뭔가 겉도는 느낌이 든다.
내가 주방 일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손 때문이다. 내 손은 일명 '재벌 며느리 손' 또는 '딱 손만 공주'라고 불린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그릇 몇 개를 닦아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손바닥의 껍질이 훌훌 다 벗겨진다. ㅜㅜ
고무장갑 안에 면장갑까지 끼고 설거지를 해도 어느덧 손바닥이 갈라지고 피가 난다. 내 손은 오로지 내 얼굴과 몸만 씻으려고 태어난 아주 이기적인 손이다. 엄마는 예전부터 나에게 '피부가 너무 약'하니 절대 집안일을 과도하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주부에게 손에 물 닿을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찬바람이 불 즈음부터는 발도 다 터져서 갈라진다. 손발이 거의 제구실을 못한다고 봐야 한다. 물건 정리라도 하면서 박스 몇 개를 맨손으로 만진 날도 어김없이 손에서는 난리가 난다. 한동안 연고와 핸드크림을 부지런히 바르고 손을 공주 모시듯 떠받들어 주어야 간신히 제 상태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니 손이 아파 고생하는 게 싫어서 '손쓰는 일'을 늘 미루다 가장 마지막에 하게 된다. 요리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도 달리 있지 않다. 채소 씻고 다듬고 썰고 나면 손이 남아나질 않는다. 비닐장갑을 끼고 일해야 하니 항상 어눌하다.
나는 나이 오십이 되도록 나물을 맨손으로 무쳐본 적이 없다. 썰어놓은 청양 고추를 맨손으로 만졌다가 손이 불타 없어져 버리는 줄 알았다. 일주일 가까이 손바닥이 화끈거려 일상이 마비되어 버렸다. 아이스팩을 손에 쥐고 울면서 지냈다.
청량고추가 먹고 싶으면 비닐장갑 끼고 가위로 잘라야 한다. 요리 잘하고 살림 잘하는 사람들이 날 보면 '저 아줌마 왜 저래???? 어디 많이 모자란 사람 아냐????' 할 것이다. 기능적인 면에서 보면 내 손은 거의 5세 미만 아기 손이나 다름없다.
이 손으로 살림을 하다보니 실력이 나아지질 않는다. 손이 아파서 일을 안하게 되고. 점점 더 하기 싫어지고 요리나 살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이런 마음들이 쌓이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절대 그러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사 먹는 걸 택한다. 내가 내 몸까지 혹사하고 마음까지 다쳐가면서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살림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해놓는 반찬 몇 가지, 국 한 그릇에도 남편이나 딸아이는 다시 못 먹을 것처럼 열심히 먹어준다. 맛이 있건 없건 그들에겐 그게 중요하지 않다. 아예 못 얻어먹을 수도 있기에 주는 대로 무조건 먹어준다. 그게 고마울 때도 많다.
그런데 가끔씩 요리 실력과 상관없는 엉뚱한 짓을 해서 살림을 더욱 더 못하는 여자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급우울해진다.
몇 주 전. 찌개를 끓이려고 냄비를 찾다가 뜬금없이 내 손에 무쇠솥이 걸렸다. 남편에게 누룽지를 해주겠다고 산 무쇠솥이었다. 거기에 밥을 해 먹으면 누룽지가 잘 만들어져서 한때 열심히 해 먹기도 했다.
'밥은 압력솥에 하고 찌개를 무쇠솥에 끓여 볼까?'
그런 생각은 안 했어야 맞다.
엉뚱한 생각을 해도 생각으로만 끝내면 좋았을텐데 그냥 실행했다. 무쇠솥이 찌개 맛을 더 좋게 만들어 줄 거라 무작정 믿으며 돼지고기와 감자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뚜껑을 덮어 끓이려는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났다. 원래 무쇠솥의 뚜껑 말고 냄비의 뚜껑을 덮어 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하고 방정맞은 생각이 든 것이다. 옆에 있던 스테인리스 냄비의 뚜껑을 손에 쥐었다. 냄비 뚜껑이 얼추 무쇠솥에 맞을 것 같았다. 약간 작아서 무쇠솥 안쪽으로 쑥 빠져 들어갔다. 신나게 가스불을 키워 찌개를 끓였다.
솥단지에서 김이 폴폴 나니 이제 곧 갖은 야채를 넣고 한소끔 후루륵 끓여 내서 저녁상에 놓고 맛있게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무쇠솥의 짝꿍 뚜껑이 아닌 다른 냄비의 뚜껑을 덮은 게 화근이었다. 사이즈가 작았던 뚜껑을 무쇠솥 내부에 대충 걸치듯 얹어 놓았는데 가열이 되면서 압력이 생겨 열리지 않는 불상사가 생겨버렸다.
어처구니없는 믹스매치.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되는 거였어. ㅜㅜ
하는 수없이 전날 먹던 국으로 대충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딸아이와 나는 무쇠솥에서 솥뚜껑을 빼내는 일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 한 시간도 넘게 솥단지와 씨름을 했다) 하지만 무쇠솥이 뚜껑을 먹어 버리고 싶었던 건지 숱한 시도에도 뚜껑은 열리지 않았다. 뚜껑이 안 열려서 진짜 뚜껑이 열리는 기분. 화나면서도 울적했다.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무쇠솥에 밥을 하고 냄비에 찌개를 끓이면 되는데 나는 왜 자꾸 색다른 짓을 해서 일을 만들까?
무쇠솥에 맞는 뚜껑을 내버려 두고 냄비 뚜껑을 덮어 볼 생각 같은 건 대체 왜 한 걸까?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찌개도 못 먹고. 뚜껑도 안 열리고. 결국 무쇠솥 전체를 버려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자. 기분이 급우울해지면서 내가 싫어졌다. 몇 주전 내가 싫어진 이유이다.
앞으로는 늘 정도(定道 - 뚜껑끼리 짝 맞추기)만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뜬금없는 호기심은 주책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 이 날의 슬픈 교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