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어린이 날. 친정엄마가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언니, 오빠와 만났다. 정작 우리의 아이들은 스케줄이 있어서 다 빠지고 팔순의 노모와 50대에 접어든 4남매, 그들의 배우자들만 만났다.
엄마는 늙어가는 우리들이 가끔씩 어린이로 보이나 보다. 어린이날, 식당에서 어린이가 단 한 명도 없는 테이블은 우리들 뿐이었다. 식당 손님의 평균연령을 엄청나게 올려 놓으며 우리는 어린애들처럼 웃고 떠들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팔순 엄마와 중년의 어린이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슬쩍 내미셨다.
웬 청년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어서 큰 조카인 줄 알고 자세히 봤더니 아니었다. 엄마는 아끼는 큰손자 대신 모르는 남의 집 아들 사진을 붙여서 지니고 다녔다. 거참 희한한 일일세~
노모의 핸드폰에 스티커 사진으로 붙어있는 청년
큰 언니에게 사진 속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 사람을 정말 모르냐며 대답 대신 질문을 한다. 어리둥절하는나와 남편을 보며 모든 가족들이 어떻게 이 사람을 모를 수 있냐며 황당해 했다.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트롯 진이 된임영웅이란다. 사람 이름이 영웅이다. 성은 임이고. 나는 드라마는 가끔씩 봐도 음악 프로그램이나 예능은 거의 안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친정 식구들을 만나지 않은 사이 그들은 세트로, 단체 관광버스 탄 사람들 마냥 임영웅의 광팬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오마나.....
일단
<83세 되신 엄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임영웅의 노래로 하루를 시작하심.
하루 종일 임영웅 노래를 백그라운드 삼아 신문 보고 집안일하신다고 함.
짬짬이 유튜브로 노래 들으며 따라 불러서 전곡 다 아심.
노래가 애절해서 눈물 흘리신 적도 있다고 함.
<56세 큰언니>
임영웅이 잘 마신다는 OO 유업 바리스타 룰스 커피를 박스째 놓고 드링킹한다고 함.
임영웅이 모델인 홈쇼핑 화장품을 사서 동생들에게 막 줌. 그래야 또 사서 매출 올려 줄 수 있으니까.
미스터 트롯 방송하는 날은 본업인 약국을 10분 먼저 닫고 전력질주해서 집에 간다고 함.
본인 말에 의하면 미친 듯이 날아간다고 함.
<54세 작은언니>
일본어 강사이나 일본어를 많이 까먹은 대신 그 자리에 임영웅 정보를 AI 수준으로 탑재함.
임영웅의 아줌마 팬들이 1억 4500만 원 모아서 기부했다는 사실 전함.
아줌마 팬들이 OO 유업에 전화해서 임영웅이 잘 마시는 바리스타 룰스 커피 모델 시켜달라고 떼쓴^^ 것도 알고 있음.
거기에 언니도 일조한 게 아닌지 매우 의심되는 상황.
큰언니는 40년째 가수 조용필의 골수 팬으로 각종 콘서트, 디너쇼에 다 간다. 비가 오면 비옷 입고 장대비를 맞으며 서너 시간씩 꼼짝 않고 구경하는 사람이다.
그때마다 엄마와 함께 다닌다. 엄마는 언니가 가자니까 마지못해 따라다녔다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임영웅 콘서트를 하면 노모가 가장 먼저 앞장서실 기세다. 세 모녀가 함께 다닐 듯하다.
코로나로 인해 두 달 넘게 집 밖 출입을 삼가신 엄마에게 임영웅은 자식 보다 더한 효도를 한 셈이다. 엄마는 임영웅 노래 듣는 재미로 코로나가 지루한지도 몰랐고 날마다 기분이 좋았다고 하신다.
임영웅 이외에도 미스터 트롯 출연진들을 줄줄이 섭렵하고 그들의 특징과 사연들까지 다 알고 계신 노모가 나는 참 반갑다. 83세에도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그들의 콘서트를 기다리고, 그들이 나온 제품을 사주는 열정. 아무것도 안 좋아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보다 이 얼마나 건강한 감정인가!
할머니가 주책이다. 라는 말은 맞지 않다. 육신은 늙어도 감정은 늙지 않는다는 걸 매 순간 느낀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취미를 가진 노년층과 중장년층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가는 엄마와 언니들의 생기발랄한 표정을 보면 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 집에 보일러 놓아드리듯. 1가구 1임영웅을 초빙, 보급해 드리고 싶다.
임영호?라고 이름 잘못 말했다가 그녀들에게 몰매 맞을 뻔한 나도 이제는'임영웅'을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