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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Apr 09. 2020

화 잘 내던 선배가 벤츠 문콕을 당했다

문콕 당한 후,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


내가 아는 선배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그녀의 성격을 A라고 정의 내리고 나면 보란 듯 B의 양상을 띄고 B 인가보다 하고 믿고 있으면 어느새 C 타입으로 줄달음질 친다.


 '이 사람은 뭐지? 대체 뭐래?'


굉장히 헷갈린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선배는 빠르고 정확했으며 부지런하고 꾸준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했고 그로 인해 능력도 인정받았다.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였는데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녀는 화를 잘 냈다. 보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으니 너그럽게 굴어도 될 텐데 쪼잔한 구석이 많았다.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 예의 없는 사람은 대놓고 무시도 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예상을 깨고 굉장히 인자하게 굴고 뜻밖의 잔정까지도 보여주었다.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가 그녀의 컨셉인 것 같았다.


'대체. 너의 정체는 뭔데?'


선배는 전문직 여성으로 연봉도 높고 재산도 많았으나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과는 코드가 전혀 맞지 않았다. 적은 월급으로 명품 사냥에 골몰하는 직원들은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월급이 적은 직원들이 왜 4-50만 원짜리 신발만을 사신고 돈이 모자라 카드대출을 받는지 이해를 못 했다. 날마다 돈이 모자란다고 징징대면서도 호텔 베이커리에서 몇 만 원씩 되는 디저트를 사 먹고야 마는 직원을 한심해했다.


월급은 따박따박 받아 가면서도 일하기보다는 하루 종일 물건 검색만 하거나 시간만 때우는 얌체 같은 직원은 바로 내치고 싶어 했다. 직원들도 대표의 서릿발 같은 눈총을 눈치채고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러나 월급을 착실히 모으는 직원, 아껴 쓰고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잘해주었다. 보너스도 잘 주고 선물도 챙겼다.


'아니, 월급 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돈 쓰는 데 뭐가 잘못이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모범적인 틀에서 벗어난 적 없는 그녀의 눈에는 애써 번 돈을 꼬박꼬박 모으는 직원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비싼 물건에 돈 쓰지 않던 그녀도 10여 년 전 낡은 차를 바꿔야 하는 시점이 오자 새 차를 알아봤다. 강남에 사업장을 가지고 있던 능력 있는 그녀에게 직접 몰고 다닐 자동차로 벤츠가 적당하다고 지인들이 강권한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그녀는 예상과 달리 주변 이야기에 홀랑 넘어가서 하루아침에 벤츠녀가 되었다. 구두쇠 기질을 가진 그녀의 의외의 선택에 나는 무척 놀랐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수입과 능력으로 따지면 훨씬 전부터 몰았어야 할 벤츠였다. 늦은 선택에도 그녀는 나름 만족을 하는 것 같았다.


달리는 차 지붕 위의 선루프를 열어주며 머리를 밖으로 내 보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한 적도 있었다. 10여 년 전 선배의 벤츠를 얻어 타며 별 촌스러운 짓도 다 했다.


돈은 많지만 돈 쓰기를 아까워하던 그녀가 자신에게 들인 최고가 소비재인 벤츠. 그녀는 벤츠를 아꼈고 조심조심 몰고 다녔다. 워낙에 길눈이 밝고 운전을 잘해서 대리운전을 해도 한 획을 그었을 거라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렇게 사고 날 일이 없던 그녀에게 어느 날 덜컥 일이 생겨버렸다.


길가에 세워둔 벤츠 옆구리가 찍힌 사건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선배에게 잔소리 먹고 퇴사한 직원의 소행이 아닐까 혼자 상상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잔소리를 해댔다. 뭐 하러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원망을 사냐고 주제넘게 충고를 했다. 그 충고가 정말 주제넘었던 것이 벤츠 옆구리를 문콕한 사람은 퇴사 직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벤츠 문콕자는 오토바이로 퀵 배달을 하는 조선족 아저씨였다.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나는 식겁했다. 물론 조선족 대부분은 굉장히 선량한 분들이지만 영화 속에서 과하게 표현된 까닭에 선입견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한 성깔 하는 화 잘 내는 그녀와 조선족 아저씨가 벤츠를 사이에 두고 한판 붙는 장면이 그려졌다.


'성깔 못 죽이고 대들다가 조선족 아저씨에게 두들겨 맞는 건 아닐까?? '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길거리에서 붙은 여러 시비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도 이상한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그냥 피한다. 그러나 그녀는 지적을 하거나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창피해서 재빨리 도망가 타인인 척 거리를 두었다. 화 잘 내는 그녀와 세트로 묶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저... 저는 저런 사람 모.. 몰라요. 절대 안 친해요. 정말로요.'


나는 내 감정보다는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 언제나 민감했다. 나를 평가하는 남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참았고, 손해를 봐도 그냥 참고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사건건 따지고 요목조목 짚었다. 그러니 길에 세워둔 자신의 벤츠 옆구리가 오토바이에 찍혔는데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10년 전, 문콕(아니지. 오토바이가 부딪혔으니까 오콕인가????) 당한 벤츠의 수리비는 자그마치 300만 원이었다. (후덜덜ㅜㅜ) 사고로 심하게 찌그러진 것도 아니고 많이 파손된 것도 아닌, 약간의 흠집(약간 깊게 파임)에도 수리비가 300만 원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벤츠에 온갖 정나미가 다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화 잘 내는 그녀라도 상대가 남자인데 싸움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험처리를 하는 선에서 해결하지 않을까 했지만... 퀵 배달을 하는 조선족 아저씨가 보험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평소 선배의 소신으로 보면 아저씨가 보험이 없다고 해도 시시비비를 가려서 반드시 보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나랑 너무 코드가 안 맞는다는 확신이 들어서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

.

.

그런데


화 잘 내는 그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벤츠를 정식 수리업체에 300만 원 들여서 고치는 대신 일반 정비업체에서 대충 야매(?- 지정 수리업체가 아니라는 뜻)로 고쳤다. 그녀는 벤츠를 사서 탈 수는 있어도 벤츠를 상전 대접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기껏해야 차 주제에 코딱지만 한 흠집에 300만 원씩 돈을 들여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 엄청난 비용을 퀵 배달 업체에 전가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화 잘 내는 그녀가 앞으로 생난리를 쳐도 콱 끊어버리느니 그냥 곁에서 지켜봐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슬슬 움직였다. 벤츠 야매 수리 비용 값은 30만 원이었다. 그러자 퀵 배달 업체 사장이 조선족 아저씨를 시켜서 30만 원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충격적 반전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 돈을 퀵 배달 업체 사장 몰래 조선족 아저씨에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 자신은 수리비를 받았다고 할 테니 그 돈은 아저씨 필요한 곳에 쓰시라고 했단다. 결국 벤츠 문콕 당하고 야매 비용을 그녀, 자신의 돈으로 충당한 것이다.


아마도 퀵 배달 조선족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었을 거다. 만만한 여자 운전자라고 얕보면서 자신의 실수를 덮어 씌우려 하지 않았을 거다. 벤츠 문짝을 자신의 오토바이로 흠집 내고 큰 죄라도 지은 것 마냥 한없이 미안해했을 거다. 그랬기 때문에 화 잘 내면서도 잔정 많아 툭하면 눈물보를 터뜨리는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오늘도 화 잘 내는 그녀는 일 못하고, 게으르고, 명품만 사고, 물건 검색만 하는 사람을 째려보고 있을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박살 낼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눈에 띈 힘든 약자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예의 바르고 너그럽게 굴 것이다.


그렇게 오콕 당했던 벤츠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 숱한 문콕을 감당하면서도 그녀를 태우고 잘 굴러간다. 아마도 폐차할 때까지 타고 다니지 싶다.


값비싼 벤츠라도 '차 주제'에라고 외칠 수 있는 그녀, 벤츠 따위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그녀. 분노 폭발하고 화 잘 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녀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화 잘 내는 그녀를 감당해 보려 한다. 감당이 어려워지면 언제든 바로 도망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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