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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Apr 12. 2020

사춘기 딸이 장보기를 그만뒀다

편하지만 불편한 것들에 대한 개인적 생각


딸아이는 코로나 뉴스가 나오면 이젠 그러려니 한다. 개학도 사회적 거리두기도 연장이 되는 상황에서 자기 나름의 일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건 아이들보다도 자제력 강한 어른 역시 마찬가지니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코로나 이후 딸아이의 식성과 취미가 점점 빠른 속도로 진화되고 있다. 3년 전만 해도 몸에 살점이라고는 없고 기초체력도 전무해서 내 속을 까맣게 태우던 아이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18세, 지금은 못 먹는 거없이 다 먹는다. 아프리카 난민 수준으로 말라있던 아이가 3년이 지난 지금은 볼에 살도 통통 오르더니 체중이 꽤 나간다. 


그런데 딸아이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는 남편은 지나치게 먹어서 '확.찐.자'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다. 적당히 먹고 운동을 더 하라고 한다. 아이 본인도 갑자기 확 늘어난 체중이 부담스러운지 하루에도 한두 시간씩 실내 자전거를 탄다. 거기까지는 참 좋은데 그러고 나면 반드시 먹방을 찍는다는 게 아쉽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딸아이의 새로 생긴 취미 중 하나는 장보기이다. 마켓 OO를 이용해서 장바구니에 필요한 물건들을 담은 후 나에게 보여주며 결제를 부탁한다.

 

'아, 어느새 네가 저녁 장까지 다 보는구나. (점점 사람으로 진화하는 거니?)'


온라인 쇼핑몰은 전지현처럼 예쁜 사람들만 주문하는 곳인 줄 알았다. 나 같은 아줌마는 카트 끌고 동네 마트나 재래시장에 다니면 된다고 생각해서 자세히 살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온라인 쇼핑몰에 회원 가입을 하더니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첫 회원 서비스로 1000원에 폭립을 사고, 대구 명물 꿀떡도 사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을 다 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껏 들떠 있었다그리고 나라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7000원이 넘는 손바닥만 한 식빵도 샀다며 이실직고했다. (식빵에 금 발린 줄 알고 한참 들여다 봄)


딸아이의 첫 번째 주문


내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 딸아이가 물건들을 살펴보며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죄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만 골라놓았지만 덕분에 나는 편해졌다. 손도 꼼짝 안 하면서 나한테 이것저것 주문해 달라고 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에 얼른 결제해 주었다.


밤 11시에 주문을 해도 뒷날 새벽 집 앞에 배송을 해준다는 온라인 쇼핑몰은 편리함 자체였다. 요새 코로나 때문에 O마트나 O플러스의 당일 배송은 이용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비해 온라인 쇼핑몰은 주문 후 8시간 내에 집 앞 배송을 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업체에 비해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딸아이가 주문한 온라인 쇼핑몰은 바로 뒷날 새벽. 우리 집 앞에 물건을 담은 박스들을 살포시 내려두고 사라졌다. 일반 택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새벽 배송 때문인지 설렘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와서 살짝 선물을 놓고 가는 새벽의 산타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의 품질이나 맛은 좋은 편이었다.(요리 못하는 사람에게는 괜찮을 듯) 급하게 물건이 필요한 경우라면 종종 이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때마다 딸아이가 나서 줄 테니까 말이다.


딸아이의 두 번째 주문. 식빵 싼 거 시킴. 그러나 아이스크림 비싼 거 여러 개 시킴 ㅜㅜ


그 후에도 딸아이는 심심하면 '온라인 쇼핑몰에 뭐 먹을 게 없나?' 하고 들여다 보았다.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는 특이한 것들을 먹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집 밖을 잘 나가지 못하는 요즘 같은 때, 그 정도 선택권은 아이에게 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내버려 두었다. 


딸아이는 거실 소파에서 아이패드로 콕콕 찍어 선택한 물건들이 집 앞에 오는 날이면 일찍부터 일어났다. 늦잠 방지를 위해서라도 온라인 쇼핑몰을 매일 이용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딸아이가 골라 배달시킨 먹거리를 같이 살펴보며 요리해 먹는 기쁨은 상당히 컸다.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렸다. 그 편리함 뒤에 숨겨져 있는 불편함 때문이다.


전날 밤 11시 이전까지 주문만 하면 뒷날 새벽 배송을 해 준다는 온라인 쇼핑몰의 규정은 고객과의 약속을 위해 새벽 노동을 일반화하고 당연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인문학>에도, 조한경의 <환자 혁명>에도 건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수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해가 지면 서서히 활동량을 줄여 밤에 자고 뒷날 해 뜨는 시각에 몸도 깨어 일어나는 것이 우주의 원리, 모든 생명의 원리라는 것이다.


조한경은 자신의 책 <환자 혁명>에서 모든 내용을 다 버리더라도 '수면'의 중요성 하나만은 기억해 주길 당부했었다. 수면 시간을 줄여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생명을 가불 받아서 미리 써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덜 중요한 것들을 위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삶을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선택조차 개인의 몫 아니냐? 타인의 잠자는 시간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야간 근무, 새벽 근무를 하는 수많은 분들. 병원 관계자들, 지구대 경찰들, 비상센터 직원들, 24시간 콜센터 직원들, 택시기사들, 대리기사들, 소방관들 등등. 그분들의 수고로움이 사회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까닭에 우리에게는 편안하고도 차분한 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평생 올빼미로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인 지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간다. 모두가 잠든 시간, 하루의 노동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고귀한 시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일을 해야 하는 많은 분들의 노동 앞에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들의 주문이 새벽 배송 기사분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개선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더 열악한 조건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눠 보기도 했다.  


게다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또 있었다. 박스의 개수가 문제였다. 물건이 자그마치 세 개의 종이 박스에 나뉘어 왔는데 깜짝 놀랐다. 아이스박스를 대신하는 냉동용 박스, 냉장용 박스, 일반 박스 세 개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물론 다 종이 박스라 재활용이 된다고 하지만 일반 대형 마트에서는 그 종이박스조차 제공하지 않는 추세인데 비하면 온라인 쇼핑몰의 박스 수량은 과한 면이 있다.


한번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질 좋은 포장재들. 재활용 하려고 전부 보관중




그냥 재활용 쓰레기로 분리수거해 버리기에는 박스 자체가 튼튼하고 쓸모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박스를 버리지 못하고 테이프를 분리하여 모두 접어 모아 두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택배 물건을 보내야 한다면 최소한 새 박스를 사지 않고 기존의 박스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신속하고 정확한 편리함이 좋고 감사하지만, 주문한 물건들을 펼쳐보며 재잘거리는 모녀의 즐거움도 크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이런 불편함들을 고민하게 된다. 딸아이가 먹고 싶다고 콕콕 손쉽게 찍어 누르는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더 많은 쓰레기가 양산되어 환경을 해롭게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우리의 온라인 쇼핑몰 주문은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행복하고 기쁜 만큼 타인의 상황과 감정도 엇비슷하기를 바라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딸아이가 장보기를 서서히 그만두는 이때, 어서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마스크 없이 재래시장과 마트를 활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겐 비닐봉지도 박스도 필요치 않다. 우리 집에는 물건을 담기 위해 항상 대기 중인 카트가 세 개나 있다. 그 녀석들을 끌고 딸아이와 아무 때나 편하게 장을 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때가 오면 참 기쁠 것이다. 









PS) 이 글은 특정업체를 비난할 의도로 작성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저 온라인 마켓을 새롭게 경험해본 엄마와 딸의 사적인 견해일 뿐이에요. 업체에서 보내온 음식의 품질과 맛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포장과 배송에 대한 고민은 업체에서 소비자인 저희보다 훨씬 더 많이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드리거나 피해를 드리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몇 자 덧붙였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은 댓글들을 달아주셔서 다 읽어보았습니다. 주신 댓글들에 일일이 답글을 달고 싶은데요. 그럴 경우 계속 같은 말이 반복될 듯하여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을 전체 댓글로 달았습니다. 그런데 댓글의 양이 많아지다 보니 찾기가 쉽지 않네요. 차라리 본문에 옮겨 적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댓글을 읽은 후 저의 마음을 아래에 남깁니다. 잘 읽어주시고 여러 의견들 말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댓글 1,2>


제 글이 브런치 카카오톡 채널에 떠서 갑자기 댓글이 많아졌네요. 7개월간 브런치를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청소기를 밀다가 밀쳐두고 댓글을 답니다.


상호가 나오는 바람에 제가 그 회사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시는 분이 계실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상호명을  온라인 쇼핑몰로 처리했습니다.)


실은 예전에 이 글을 올리자마자 어떤 분께서 댓글로 남편분이 그 업체 디자인을 담당하시며 애쓰시는데 제 글이 그런 노고를 몰라주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다는 의견을 남겨주셨어요.


그분께 오해를 풀어드리려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요. 그 사이 본인의 댓글을 삭제하셨더군요. 마음이 상하셨을까 봐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았어요. 내 남편, 내 가족, 내 지인의 직장을 곤란하게 하는 글을 보면 불편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추가의 글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 회사를 광고하는 게 아니고요. 그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또 다른 일자리인 새벽 배송, 또 다른 일자리인 박스 제조업체 등등에서 일하시는 다른 모든 분들의 입장도 생각해 보며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이긴 하지만... 오로지 제 생각만을 나타내면서 다른 분들께 피해드려도 된다는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습니다.


잠을 줄여가며 일하시는 분들의 노고와 환경문제에 대한 생각을 딸아이와 나눈 사적인 글이었지만 공개적인 장소에 올렸으니 조금은 더 신중했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와 남편의 평상시 주고받는 농담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도 실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이가 외동인지라 자칫 저희의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철없는 아이의 응석과 버릇없음을 다 받아주게 되어 버리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기만을 바라며 키웠습니다.


엄마, 아빠라고 해서 자신의 일을 모두 대신해 주기를 바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하며 키웠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아이 본인도 스스로 힘으로 무슨 일이든 처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남편도 집안일을 잘 못하기는 해도 돕습니다^^


공개되는 글이 갖추어야 할 의무와 책임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께 읽힐 줄 몰랐지만... 제 글이 단 몇 분께 읽히더라도 불편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늘 돌아보며 주의하며 썼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자를 비하하거나 딸에게는 당연히 집안일을 시키고 남편은 뒷짐 지고 있어도 된다는 뜻으로, 그런 의도로 올린 글이 아니었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 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 인사 전합니다. 주신 귀한 댓글들은 앞으로의 글쓰기에 잘 반영해서 보다 성숙한 자세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월요일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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