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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0. 2020

울면서계단 오르기1년과 EBS 녹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무수한 계단과 계단들

사흘 전, 17일은 21층 계단을 오른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꼭 해야겠다는 의무감 없이 우연하게 시작한 계단 오르기를 1년 동안 지속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달, 브런치에 '울면서 계단 오르기, 300일'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 메인에 걸려서 10만 회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브런치와 EBS가 공동으로 기획한 '브런치,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 당선되는 행운도 가져다주었다. 단지 계단만 올랐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 셈이다.  


너무 힘들어서 토 나올 것 같고 계단 위에서 쓰러질 것 같았던 시간들. 눈물 콧물 쏙 빼던 날들을 지나 일주일, 한 달, 두 달을 넘어 100일, 200일, 300일, 1년을 채워 나갔다.


중간에 배탈 났을 때 한번, 감기 몸살로 힘겨울 때 한번. 이렇게 두 번을 빠졌는데 체크해 놓았다가 다른 날 하루에 두 번씩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보충을 했다.


그러니 그 두 번 빠진 것 때문에 매일 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냥 "매일 올랐다"라고 믿고 있다. 그 정도면 매일 올랐던 것과 다름없다고 통 크게 생각해 주기로 했다. 


일산  EBS 구경감


 EBS의 밀크 피디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브런치, 나도 작가다' 공모전 당선자들은 EBS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당선된 글을 낭독하여 녹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녹음 가능 날짜 몇 개를 정해주셨는데 9월 10,17, 24일 중에서 내가 가능한 날짜는 17일뿐이었다. 피디님께 그날 뵙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다른 일정들을 진행하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다.


9월 17일은 계단 오르기를 한 지 1년째 되는 날이라는 것을 말이다. '울면서 계단 오르기, 300일'로 당선되어 계단을 오른 지 1년이 되는 날, 그 글을 녹음하러 간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당일 아침 일찍 일산 EBS에 도착하여 브런치 작가님들 사이의 소문대로 밀크처럼 뽀얗고 아름다운 밀크 피디님을 만났다. 너무나 환한 미소로 맞아 주시며 친절하고 다정하게 일일이 설명을 해 주신 덕분에 긴장할 새도 없이 편안하게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다만 태생적으로 굵고 낮은 목소리가 그날따라 잠겨서 침만 꿀꺽꿀꺽 삼키다가 가까스로 녹음을 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 글을 내 목소리로 녹음하는 이런 날도 있다 싶으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스페이스 공감 스튜디오인 듯



이번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 접수된 글은 만 개가 넘었고 그중 60편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경쟁률로 따지면 200 대 1 가량이다. 나는 대학 입학시험 2.5대 1의 경쟁률 앞에서도 번번이 고꾸라져서 삼수씩이나 한 사람이다.


200명 중에 한 명을 뽑는 공모전에 당선이 되는 건. 실력 덕분이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실력보다 더한 '행운'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운이 없었다면 어떤 실력 있는 자도 200대 1을 뚫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릴수록 내게 온 행운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귀한 행운을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래서 그날 울적해하던 후배를 EBS 근처에서 만나 세 시간가량 웃겨 주다가 왔다. 후배는 그런 나를 주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펭수의 인기를 실감함



나는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갱년기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3-4년간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며 누워서만 지냈다.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다시는 열심히 살거나 즐겁게 살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냥 살아있으니까 눈 뜨는 거고, 눈이 떠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걸 거라고 여겼다.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졌고 더불어 머리카락도 한 움큼씩 빠졌다. (곧 해골 같은 대머리가 될 거라 여겨서 더 우울했다)


그런데 끝 간데 없이 떨어져 밑바닥까지 가고 나자, 더 이상 감정적으로 내려갈 데가 없어서였는지 생각이 차츰 정리됨을 느꼈다. 너덜너덜 뜯겨나간 나의 감정들을 돌아보며 보듬어 줄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정신들을 주섬주섬 끌어다 모았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그 1년 반의 시간 중 1년이 계단 오르기였다. 나에게 계단 오르기는 운동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뿐 아니라 무기력했던 나를 땅속에서 끄집어 올려 땅 밖으로 반쯤 꺼내놓는 과정이기도 했다육체적 건강도 중요했지만 정신적 나약함을 뿌리 뽑을 다른 차원의 처방이 내겐 필요했다. 그 처방이 매일 21층 계단 오르기였다.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면 내 몸뚱이와 정신은 벌써 몇 번씩 지하세계의 원래 위치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또다시 무기력의 굴레를 덮어쓰고 세상과의 단절을 택하며 홀로 동굴 속에서 바닥을 긁으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EBS에서 녹음을 하고 온 당일 밤에도 나는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나의 계단 오르기 1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작정하고 덤벼들었던 계단 오르기가 아니어서 매일매일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계단 오른 시간을 캡처로 뜬 수많은 사진들을 보며 나는 살짝 고민에 빠졌었다. 이미 계단 오르는 로봇이 되어버린 듯도 해서 계속 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솔직히 1년 올랐으면 많이 올랐지 뭘 또 오르냐????' 하는 마음도 스멀스멀 생겨났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올랐지만 여전히 오르기 싫고 너무 귀찮고 힘든 게 계단이기에 또 오를 수 있을까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나는 갱년기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완전히 떨쳐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나는 그날 이후 사흘 째 또다시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나의 갱년기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완전히 떨쳐내는 그날까지 일단 계단 오르기는 계속하는 걸로 정했다. 


나는 앞으로도 울면서 계단을 오를 예정이다....



1년의 기록




https://brunch.co.kr/@yeon051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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