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LeeHa Jul 19. 2020

1년 후, 믹스커피 중독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믹스커피 끊어낸지 1년, 얻은 것이 있다면?


나는 30년 가까이 믹스커피 중독자로 살아왔다. 믹스커피를 안 마시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한잔을 마셔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기에 눈 뜨자마자 믹스커피를 한잔씩 타서 마시곤 했다.


매일 마시던 믹스 커피의 양은 눈덩이 불어나듯 차츰 늘어나 나중에는 하루 평균 네댓 잔씩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많이 마시는 날은 예닐곱 잔도 마셨다.



커피는 믹스가 진리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별한 운동을 하거나 관리를 받아야만 체중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나도 내가 먹는 음식들에 더 많은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은 그냥 뭘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심각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거나 먹어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게 건강에 좋지 않은 거라는 걸 검진을 통해서 알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내장비만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외관상 지방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생각 없이 먹었던 음식들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건강을 해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을 들면서 불필요한 음식을 끊어내자고 결심을 했지만 도저히 믹스 커피만은 줄일 수가 없었다. 믹스커피는 신기하게도 한 잔만 마시면 두 잔, 석 잔, 넉 잔은 자동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믹스커피와 한 몸이 된 채 살아왔다.


작년에 마키타 젠지의 <식사가 잘못되었습니다>를 읽고 나서야 눈물을 머금고 믹스커피를 끊을 수 있었다. 또 입에 늘 달고 살던 과자와 사탕류도 다 끊었다. 혈당을 높여서 끊임없이 당분을 취하게 만드는 간식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렇게 간식들을 줄이다 보니 집착에서도 서서히 벗어나게 된 것 같았다.  '커피는 믹스커피 아니면 안 돼.'라는 고정관념이 차츰 사라졌다. 믹스커피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꼭 마셔야 할 음료로 내 몸에 각인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사랑하기에는 믹스커피와의 추억이 내겐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믹스커피에서 벗어나자 세상 어떤 음료도 그럭저럭 다 마실 수 있었고, 세상 어떤 음료도 마시다가 끊어 낼 수 있었다. 나는 한 곳에 매이지 않았고 그것은 곧 세상 어디로든 흘러 들어갔다가 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단지 믹스커피 하나 끊었을 뿐인데.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주체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들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다가 느낀 깨달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를 깨달음을 믹스커피를 끊고 나서야 얻었다.


나는 믹스커피를 끊어내면서 30년 동안 지속된 나의 질기고도 나쁜 습관들을 동시에 끊어내고 있는 중이다. '믹스커피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못 해.'라는 건 내 나약함이 만들어낸 핑계이고 허상일 뿐이었다.


믹스커피와 믹스커피 만드는 회사를 중상모략 내지는 폄하하겠다는 심산이 아니다. 나의 고집스러움과 집착이 믹스커피 먹는 버릇 아래 똘똘 뭉쳐져 있었고 그것은 내 삶 전반에 영향을 끼쳐버렸다. 중독된 음료를 마시지 않음으로써 나의 지난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싶어 졌다.  




작년 6월 28일.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믹스커피를 단 한 봉지도 먹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씩 비 오는 날, 거실 창밖에 보이는 바다를 벗 삼아 믹스커피 한잔쯤은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한 봉지를 뜯으면 나 같은 중독자는 앉은자리에서 100 봉지를 죽처럼 타 먹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주제 파악을 굉장히 잘하는 편이어서 '나약한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한 약속만 믿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콜라나 다른 간식을 모두 끊은 것은 아니다. 그 후에도 콜라는 가끔씩 마셨다. 과자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사탕도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달 고질적인 두통에 2주 넘게 시달리면서 사탕이 너무 먹고 싶어 졌다. 남편에게 작은 봉지에 든 사탕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세 배쯤 큰 사탕 봉지가 내 품에 들어왔다.  


순간 그 커다란 사탕 봉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 사탕 한 봉지를 살살 녹여도 먹고, 와다닥 와다닥 깨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제 사탕 한 봉지는 다 먹었고 먹는 동안 느꼈던 즐거움과 달콤한 맛과 향기에 관한 기억은 내 안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또다시  건강에 도움되지 않는 간식류를 멀리 하겠지만 아주 가끔씩은 사 먹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다. 믹스커피를 제외한 간식이라면 몇 번 먹다가도 언제든지 그만 먹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다른 간식들은 믹스커피처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몇 번 먹다가도 흔쾌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믹스커피만큼은 다시 시작하면 헤어지지 못할 것 같다. 또 한 번의 이별 과정을 거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 듯하여 이왕지사 1년을 끊었으니 이제는 영영 내 인생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열렬히 사랑했으면 그 사랑이 끝날을 때는 미련 없이 보내 줄 줄도 아는 것이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배웠다.


나는 나의 사랑, 믹스커피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춘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잘 가, 고마웠어. 믹스커피....

 





믹스커피 중독자의 이전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글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01화 믹스커피 중독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brunch.co.kr)



이전 09화 울면서계단 오르기1년과 EBS 녹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