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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Jul 19. 2020

1년 후, 믹스커피 중독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믹스커피 끊어낸지 1년, 얻은 것이 있다면?


나는 30년 가까이 믹스커피 중독자로 살아왔다. 믹스커피를 안 마시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한잔을 마셔야 머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기에 눈 뜨자마자 믹스커피를 한잔씩 타서 마시곤 했다.


매일 마시던 믹스 커피의 양은 눈덩이 불어나듯 차츰 늘어나 나중에는 하루 평균 네댓 잔씩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많이 마시는 날은 예닐곱 잔도 마셨다.



커피는 믹스가 진리라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별한 운동을 하거나 관리를 받아야만 체중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나도 내가 먹는 음식들에 더 많은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은 그냥 뭘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심각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거나 먹어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게 건강에 좋지 않은 거라는 걸 검진을 통해서 알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내장비만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외관상 지방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생각 없이 먹었던 음식들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건강을 해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을 들면서 불필요한 음식을 끊어내자고 결심을 했지만 도저히 믹스 커피만은 줄일 수가 없었다. 믹스커피는 신기하게도 한 잔만 마시면 두 잔, 석 잔, 넉 잔은 자동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믹스커피와 한 몸이 된 채 살아왔다.


작년에 마키타 젠지의 <식사가 잘못되었습니다>를 읽고 나서야 눈물을 머금고 믹스커피를 끊을 수 있었다. 또 입에 늘 달고 살던 과자와 사탕류도 다 끊었다. 혈당을 높여서 끊임없이 당분을 취하게 만드는 간식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렇게 간식들을 줄이다 보니 집착에서도 서서히 벗어나게 된 것 같았다.  '커피는 믹스커피 아니면 안 돼.'라는 고정관념이 차츰 사라졌다. 믹스커피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꼭 마셔야 할 음료로 내 몸에 각인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메리카노의 맛을 사랑하기에는 믹스커피와의 추억이 내겐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믹스커피에서 벗어나자 세상 어떤 음료도 그럭저럭 다 마실 수 있었고, 세상 어떤 음료도 마시다가 끊어 낼 수 있었다. 나는 한 곳에 매이지 않았고 그것은 곧 세상 어디로든 흘러 들어갔다가 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단지 믹스커피 하나 끊었을 뿐인데.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주체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들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다가 느낀 깨달음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를 깨달음을 믹스커피를 끊고 나서야 얻었다.


나는 믹스커피를 끊어내면서 30년 동안 지속된 나의 질기고도 나쁜 습관들을 동시에 끊어내고 있는 중이다. '믹스커피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못 해.'라는 건 내 나약함이 만들어낸 핑계이고 허상일 뿐이었다.


믹스커피와 믹스커피 만드는 회사를 중상모략 내지는 폄하하겠다는 심산이 아니다. 나의 고집스러움과 집착이 믹스커피 먹는 버릇 아래 똘똘 뭉쳐져 있었고 그것은 내 삶 전반에 영향을 끼쳐버렸다. 중독된 음료를 마시지 않음으로써 나의 지난날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싶어 졌다.  




작년 6월 28일.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믹스커피를 단 한 봉지도 먹지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씩 비 오는 날, 거실 창밖에 보이는 바다를 벗 삼아 믹스커피 한잔쯤은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한 봉지를 뜯으면 나 같은 중독자는 앉은자리에서 100 봉지를 죽처럼 타 먹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주제 파악을 굉장히 잘하는 편이어서 '나약한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한 약속만 믿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콜라나 다른 간식을 모두 끊은 것은 아니다. 그 후에도 콜라는 가끔씩 마셨다. 과자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사탕도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달 고질적인 두통에 2주 넘게 시달리면서 사탕이 너무 먹고 싶어 졌다. 남편에게 작은 봉지에 든 사탕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세 배쯤 큰 사탕 봉지가 내 품에 들어왔다.  


순간 그 커다란 사탕 봉지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오로지 나 혼자 사탕 한 봉지를 살살 녹여도 먹고, 와다닥 와다닥 깨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제 사탕 한 봉지는 다 먹었고 먹는 동안 느꼈던 즐거움과 달콤한 맛과 향기에 관한 기억은 내 안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또다시  건강에 도움되지 않는 간식류를 멀리 하겠지만 아주 가끔씩은 사 먹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다. 믹스커피를 제외한 간식이라면 몇 번 먹다가도 언제든지 그만 먹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다른 간식들은 믹스커피처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몇 번 먹다가도 흔쾌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믹스커피만큼은 다시 시작하면 헤어지지 못할 것 같다. 또 한 번의 이별 과정을 거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 듯하여 이왕지사 1년을 끊었으니 이제는 영영 내 인생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열렬히 사랑했으면 그 사랑이 끝날을 때는 미련 없이 보내 줄 줄도 아는 것이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배웠다.


나는 나의 사랑, 믹스커피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춘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잘 가, 고마웠어. 믹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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