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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03. 2020

10kg 감량한남사친이 전해준, 나의 쓸모

나란 인간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30년 가까이 된 친구다. 친구 사이라도 우리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친구인데도 굳이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그가 내 남사친들의 친구라서 그렇다. 고등학교 연합 동문회에서 만난 남사친들은 전부 공대생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그들의 과 동기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의 반가운 연락은 그 옛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남사친들과 그들의 친구들과도 친구가 되어 어울려서 술 마시고 놀았던 대학시절. 별 기대 없이 시작했던 대학생활은 의리 있던 남사친들로 인해서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여러 가지 재미있고 유쾌한 에피소드들은 내게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도 주었다.  


중년의 아저씨가 된 남사친들은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자리를 잡고 다들 든든한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서로 연락하지 않는 시간들이 길어도 몇 년 만에 소식이 닿아도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얘기 나눌 수 있는 건 지난 시간들을 함께 한 우리들만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연락 온 남사친은 유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친구의 전설 같은 이야기보따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었고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웃긴 친구를 나 역시 말로, 행동으로 웃긴 적이 많았으니 나도 유머라면 빠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반평생을 살아왔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갑자기 그 친구가 내 블로그의 글을 잘 읽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동창들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깜짝 놀랐다. 친구는 내 인스타를 우연히 발견하고 블로그 링크를 타고 들어가 봤던 모양이다.  


'글을 잘 읽었다'. '공감했다' 등등의 말은 그냥 그가 내게 주는 덕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의 실질적인 변화를 전해 듣고 나자 '내 글을 잘 읽었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구는 나의 블로그에 있던 글들 중 계단 오르기 내용들을 봤던 모양이다. 그 포스팅 중 어떤 부분이 그를 움직이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친구는 내 글을 읽고 난 후 매일 계단을 올랐고 또 출퇴근 길 걸어가기에까지 도전을 했단다. 단 석 달 만에 몇 년 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던 몸에서 10킬로그램의 살을 빼버렸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계단 오르기만 꾸준히 해도 체중감량이 되기도 한다. 비교적 몸무게에 변동이 없던 나도 나이가 들면서 허리나 옆구리에 조금씩 살이 붙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300일 넘게 21층 계단을 오르고 있는 지금은 그런 군살들이 사라졌다. 다른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계단만 오르고 있으니 '계단 오르기 운동 효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체중 감량 소식에 반갑다고 말했지만 친구에게 나의 심정을 더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얼굴도 못 봤고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음에도 내가 쓴 글을 보자마자 자신도 따라서 실천해 볼 마음을 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친구의 와이프도 좋아한다는 말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친구는 아이를 늦게 봐서 이제 겨우 일곱 살이다. 어린 딸아이가 씩씩하게 자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빠의 의무라는 생각도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날마다 계단을 오르지 못할 이유나 변명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오르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냥 오른다'가 내게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자 동기부여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친구에게까지 전해진 동기부여는 그의 실행을 이끌어 냈고 뛰어난 효과도 증명해 보였다. 나의 작은 변화가 친구의 변화와 맞물려 나아간다는 생각에 최근 들은 그 어떤 소식보다도 반가웠다.





<논어> 위정 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그 쓸모를 알 수가 없다. 만일 큰 수레에 소의 멍에를 맬 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말의 멍에를 걸 데가 없으면 어떻게 그것을 끌고 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이다. 


공자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사람에게 '신의'란 그의 쓸모를 가늠하게 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이해가 된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쓸모, 몇 자 적은 글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와의 첫 만남 이후 30년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뀐 시간이었고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은 세월이었다. 내 친구는 그 사이 내가 어떤 인간으로 어떻게 바뀌어 버렸을지 의심해 본 적도 없었을까? 어찌 무턱대고 나를 따라 행동했을까? 도대체 나의 무엇을 믿고 계단을 올랐단 말인가. 


그 옛날 내가 친구들에게 보여줬던 투박한 진심을 그는 그때도 믿어주었고 지금도 믿어주는 것 같다. 공자님 말씀대로 내 삶에는 친구가 무작정 믿고 끌고 갈 만한 멍에를 걸칠 부분이, 아주 작은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나 보다.


내 삶 한 귀퉁이에라도 소의 멍에든 말의 멍에든 척 걸치고 끌고 갈만한 곳이 있다면, 그렇다면 나의 쓸모는 증명된 것일까. 오랜만에 온 친구의 연락 앞에 나는 '신의'를 바탕으로 내 삶을 잘 여미며 앞으로도 30년 이상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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