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동에 있어서만큼은 중도하차의 달인, 포기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하다가 금세 그만두어서 변변하게 할 줄 아는 운동이 없다. 몸을 움직이는 활동들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특별한 운동 없이 오로지 숨쉬기만 하면서 지금껏 근근이 버텨왔다.
그런데 갱년기 즈음부터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먼저였는지 마음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 아파왔다. 인생 후반전으로 넘어가기 3-4년 전부터 나는 호되게 갱년기 증상을 겪어내고 있었다.
날마다 눈뜨기가 두려울 정도로 힘겨운 날들이 지속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버렸다는 허무함이 크게 다가왔다. 절반씩이나 살았는데도 눈에 띄는 무엇 하나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도 나를 괴롭혔다. 특별히 성실하지 못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 조금 더 힘내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사이 갈수록 체력은 더 떨어졌고 몸에 이상 징후들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겨우 잠이 들었을라 치면 심장이 옥죄어오며 콕콕 찔러대는 통에 잘 수가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십여 차례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어나 앉아 있어서 약한 체력은 아예 바닥이 났다. 몸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니 늙고 초라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병원 검사를 받아봤지만 특별한 소견은 없었다. 병원을 다녀도 증상은 더 심해졌다가 덜 심해지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 무렵 우연히 아파트 로비에서 우리 집까지 걸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파트 꼭대기까지 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냥 한번 계단을 걸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딸아이가 당시 계단 걷기를 며칠 째 하고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탓도 있었다.
첫날 계단을 걸어 우리 집이 있는 21층까지 올라오는데 8분이 훌쩍 넘었다. 쉬지 않고 한 번에 5층까지 올라가는 것도 힘겨웠다. 8층에서 한 번, 15층에서 또 한 번. 난간을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야 했다. 가까스로 집에 오자마자 현관 앞 마룻바닥에 뻗어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의 휴식 뒤에 몰려오던희열은 생각보다 컸다.
'나도 계단오르기 정도는 할 수 있겠구나.'
만보 걷기나 마라톤 하기. 헬스장 가서 PT 하기, 필라테스 하기 등등 이런 운동들을 매일 할 자신은 없었다. 나 자신에게 무리한 종목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억지로 약속하고, 못 지켰을 때 스스로를 원망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의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나 혼자 아무 때나 나가서 단 시간에 숨을 턱밑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계단오르기를 꾸준히 해보자고 결심했다. 갱년기 몸 상태의 내가 타협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운동이기도 했다.
그 하루를 시작으로 나는 그 뒷날도 또 그 뒷날도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바깥 외부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 계단은 연중무휴, 24시간 아무 때나 오를 수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계단오르기를 빼먹지 않고 하다 보니 될 수 있으면 한 달을 채우고 싶어 졌다. 그 한 달을 채우고 났더니 두 달을 채우고 싶어 졌고 100일을 채우고 싶어 졌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100일째 되던 날이었고 나는 어김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 사이 나에게 있던 불면증은 사라졌고 가슴이 죄어오던 증상도 잦아들었다. 워낙에 만성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그 역시 완화되었다. 나의 두통은 심리적인 요인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경 쓰는 일이 늘어나면 어쩔 수 없이 도졌다. 그리고 앓을 만큼 앓아야 나았다. 지금도 가끔가다 두통이 생기지만 계단오르기 전보다는 빈도와 정도면에서 훨씬 나아졌다.
5층까지 계단을 오르면 체조 15분을 한 것과 맞먹는 양의 운동효과가 있다고 한다. 21층까지 계단을 오르면 숨은 가빠지고 심장은 터져나갈 것만 같다. 심장의 쿵쾅대는 소리가 온몸에 전해져 오면 그 소리만큼 빠르게 혈액도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거라는 상상을 한다. 저체온증으로 고생하던 지인도 계단오르기를 시작한 이후 체온이 오르면서 몸이 훨씬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는 둘 다 계단오르기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라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그만 둘 수가 없다.
처음 며칠간은 오르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눈물이 났다. 땀인 줄 알았는데 눈물이었다. 중간중간 울면서도 계단을 올랐다. 어떤 날은 다리가 끊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같은 계단이라도 특별히 더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매일 오르기로 마음먹은 이상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계단오르기는 100일을 지나 200일, 300일을 넘어섰다. 그러는 동안 단 하루도 빠진 날이 없었을까?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심하게 배탈이 나서였고, 또 한 번은 감기로 온몸이 욱신거려서였다. 그 빠진 두 번을 체크해 두었다가 몸이 낫고 나서 보충을 했다. 하루 두 번, 21층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말이다. 매일매일 올랐다고 하기에는 빠진 두 번이 걸리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채워서라도 습관으로 만들고 싶었다.
늑장을 부린 날, 밤 10시나 11시가 넘은 시각에 옷을 갈아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일을 귀찮음 때문에 어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크다. 작은 습관을 매일 쌓아나가기는 너무 어렵지만 그걸 깨뜨리는 건 순식간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자정 전에는 무조건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온다.
사실 21층 계단을 오른다고 눈에 띄게 체력이 좋아져서 갱년기 증상을 다 떨쳐버리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시작한 사소한 일일지라도 300일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하고 나자 심신에 변화가 생겼다.
날마다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서 캡처를 뜬 기록들은 좋은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한 하나의 증거가 되어 주었다. 운동 이외에도 새벽 기상, 독서, 글쓰기 등등 매일의 해야 할 일들을 아주 적은 양이라도 함께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루의 체계가 잡혀 나갔고 일상의 습관이라 이름 붙일만한 일들이 생겨났다. 삶의 방식으로서 내 나름의 철학이 생긴 것이다. 매일 하는 그 일들이 모여서 내가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에게 300여 일간의 계단오르기는 쇳덩어리보다 더 무겁고 지쳐있던 내 몸뚱이 하나를 끌어올리면서 우울했던 마음까지 같이 당겨 일으켜 세워준 소중한 과정이었다.
대단한 성과를 하루아침에 낼 자신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애초부터 그럴만한 능력도 없었고 그런 능력이 없으니 꿈꿔 본 적도 없다. 내 분수에 넘치는 과욕은 부리지 않는다. 생긴 대로 내 꼴에 맞는 내가 할 수 있는 고만고만한 일들을 습관으로 잡아가며 나의 삶을 조율해 나가고 싶을 뿐이다.
어제까지 327일째 계단을 올랐다. 대단한 무엇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가치하며 희망 없는 일도 아니었다. 생각을 비우고 나를 키우는 쪽으로 서서히 움직여 보기에는 계단오르기가 꽤 괜찮은 운동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