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LeeHa Apr 16. 2020

앤 해서웨이 닮은 후배의 반전 스토리

스튜어디스 후배, 알고 보니 천재였다

(브런치에 스튜어디스 작가님들이 많으셔서,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스튜어디스에 관한 글을 올리는 게 맞나???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제 브런치에 가끔씩 와서 엉뚱한 댓글을 달아놓고 도망가는 전직 스튜어디스 후배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하고 싶어서 올립니다. 이 글은 후배의 진심에 대한 제 나름의 사랑 표현이랍니다)







나는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친해져서도 내 나름의 규칙이 있다. 말을 잘 놓지 않는다. 늘 존대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격식을 차려서 딱딱하고 재미없게 굴지는 않는다. 나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두고 '재미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잠깐의 틈에서도 깨알 자랑. 컥)


물론 예외는 있다. 그냥 왠지 모르게 주는 것 없이 내가 싫다는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재미도 없는 인간이 거리감도 많이 두네' 이렇게 생각을 할 거다. 뭐,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 능력 밖의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


친한 작가님의 딸이 대학 시험에 합격해서 만났을 때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그랬더니 작가님이 나에게 '무슨 애한테 존대냐?'며 황당해했다. 자기 딸에게는 존대하고 정작 본인에게는 간간이 까불며 말을 놓는 나를 '외계인' 보듯 던 눈빛을 기억한다.


이렇게 '존대'를 일상화하는 내 나름의 규칙, 철칙을 깬 의외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나보다 세 살 어린 후배인데.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그녀는 나한테 말을 놓았다. 나는 물론 존대를 계속했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말이다.


그녀는, 내가 웃기다면서 살살 놀리기 시작했다. 싫지 않았다. 예의 없이 반말하고 싸가지 없이 놀리면 나도 '인간관계 목록'에서 가차 없이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에는 늘 귀여운 장난과 눙치는 유머가 있었다. 나랑 코드가 딱 맞았다. 나도 그녀가 좋아졌다.


게다가 친구 예닐곱 명이 각자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그녀는 밥 먹고 난 설거지를 매끼 혼자 독차지해서 비호처럼 끝을 내버렸다. 내가 좀 하려고 하면 난리를 쳤다. 얻어맞기 싫어서 설거지를 한 번도 못했다. 그녀는 내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못하게 했다. 생김새와는 정반대로 궂은일에 솔선수범하는 그녀가 더 좋아졌다.  


그녀는 내가 가장 애정 하는 배우, 앤 해서웨이를 똑 닮았다. 여고시절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그녀를 '소피'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의 피'가 아니라,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를 닮았다고 그리 불렀단다.  


"소피야!"

"네, 선생님."

그렇게 재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사제지간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내내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는데도 이 바보는 남자를 단 한 명도 못 사귀었다. 예쁘다고 연애를 잘하는 건 아닌 거다. 그녀를 보면 안다.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헉'했다.

'아니 TV에나 나올 법한 사람이 왜 내 앞에 있는 거지?'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 샵에서 한가로이 쇼핑이나 할 사람이 왜 내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거지?'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예쁘고 화려했다. 기품 있고 우아했다. 알고 봤더니 그녀는 D 항공사 1등석 스튜어디스 출신이었다.





그녀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보니 천재'라 불렀다.



1. 운동 천재


키 169센티에 몸무게 47킬로를 평생 유지하고 있는 넘사벽 그녀의 취미는 운동이다. 남편과 두 아들은 운동을 싫어해서 집에 있을 때도 그녀는 어깨에 사이클을 메고 집 밖을 배회했다. 골프도 배웠으나 그런 정적인 운동은 예쁜 그녀와 뭔지 모르게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몸을 마구 학대하며 굴리는 운동을 좋아한다.


한 10년 전부터는 지금껏 그녀는 배드민턴을 친다. 당시 그녀 포함 친구들이랑 배드민턴을 치러 다닌 적이 있었다. 운동 꼴찌인 나는 배드민턴을 치면서 깨달았다. '운동은 내가 감히 넘 볼 영역이 아니구나.'


그런데 이 운동 천재는 하나를 알려주면 백 개를 이해했다. 그녀는 코트에서 질주했다. 여자인 내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힘차고 매력적으로, 날렵하고 세련되게 배드민턴을 쳤다.(국가대표급으로 잘 친다)


그녀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상도 무수히 받았다. 내가 새로 산 라켓을 칠칠치 못하게 도둑맞아서 기죽은 채 앉아 있을 때도 "언니야, 괜찮아. 이거 좋은 거다. 너, 가져라." 그러면서 상품으로 받은 수 십만 원짜리 라켓도 아낌없이 내게 건네주었다.  


다시 태어나면 운동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던 그녀는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씩 배드민턴장에서 우아하게 날아다니고 있다. 늙어도 그 열정은 변함이 없다.


나의 절친들이 케이크를 고르는 중. 쇼트커트 해서웨이



2. 구토 천재 


손이 빠르고 행동이 빠른, 솔선수범의 아이콘인 그녀. '이 사람의 정체는 뭘까?' 혼자 막연히 의심할 무렵. 그녀가 스튜어디스 출신이라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스튜어디스 시절에도 다른 스튜어디스들보다 뭐든 빨라서 선배들이 그녀를 서로 데리고 가려고 했단다. 일 시키려고 말이다. 남들의 2배 몫을 해내는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근데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구토'때문이다.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 '구토'를 한다는 거다.


'잉, 구토? 그... 그게 무슨 말이니? 너, 취한 거니?'


사정은 이러하다.


후배는 언제 어디를 가나 자기 차를 운전해서 간다. 아이들 학원, 학교 픽업하는 건 뭐 이해를 한다. 대부분 주부들도 그 정도는 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먼 곳, 복잡한 곳을 가도 직접 운전을 한다. 전철역에서 만나도 전철 안 타고 차를 타고 온다.


나랑 내  남편은 운전을 서로 안 하려고 하는 운전 기피자들인지라 차를 버려 버리고 싶은데 그녀는 죽으나 사나 운전만 한다. 친구들끼리 캠핑을 갈 때도 그녀가 우리 집 앞까지 나랑 남편이랑 아이를 태우러 왔다.


우리들을 태운다고 실내 세차까지 싹 해서 차를 대령했던 그녀. 운전을 좋아하는 유별난 그녀와 운전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우리들이 잘 만났구나 싶었다. 우리 가족은 몰염치하게도 그녀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기사로 부리며 그날 하루 참 재미나게 놀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에겐 심각한 멀미 증세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타인이 운전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타면 멀미를 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버스, 지하철, 택시, 기차. 그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유는 토 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거 실화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운전을 해야만 했다. 생존 운전이었다.


"야. 그런데 어떻게 비행기는 탔냐?"

"그러니까 내가 일을 한 거야. 가만있으면 토 나오니까 남들의 두 배 세배로 빠르게 움직인 거야. 그러면 좀 괜찮거든."


토 나올 것 같아서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했다는 사람 이야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기장이라서 매번 해외여행 비행기 티켓을 거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역을 치러야 한다. 남들은 공짜 티켓으로 여행 가니 얼마냐 좋으냐고 물을 때 그녀는 '토가 쏠린다'라고 응수한다.


비행기에서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저... 저기 스튜어디스님들... 저도 전직 스튜어디스였는데요. 제가 대신 일 좀 하면 안 될까요? 토 쏠려서요."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소처럼 일을 해야 토가 멈추는 여자. 본 적 있는가?




3. 유머 천재


사람들은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억지 재미 유발자 말고 진짜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한다. 시종일관 무리하게 웃기는 사람 말고 어쩌다 한 마디씩 던졌는데 웃긴 사람. 그 사람의 웃긴 말이 자신의 감성 어느 한 부분을 탁 건드리면 불이 반짝 켜지는 거다.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명약관화다.


모두가 심각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어떤 이에게서도 의외의 반전 유머를 볼 때가 있다. 그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내가 느끼는 재미와 웃음의 지점은 상당히 낮다. 한마디로 나는 초등생 수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에도 미친 듯이 웃는다.


런 나를 날마다 웃겨주던 그녀. 그녀 역시 내가 수준이 낮아서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는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좋아했다.


그녀는 내 블로그에는 오지 않는다. 한번 가르쳐줬는데 까먹은 듯하다. 그러나 브런치에는 뜬금없이 와서 댓글을 달아 놓고 간다. 공개적인 댓글이라 비교적 얌전하게 표현을 한다. 그러나 중간중간 이상한 댓글을 써놓고 사라진다. 뒤늦게 그녀의 댓글을 발견하면  그녀의 얼굴 표정과 행동, 말투가 떠올라서 빵빵 웃음이 터진다.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난 다음 현빈에 대한 내 느낌을 브런치에 올린 적이 있다. 딸아이가 리정혁 흉내를 내면서 나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그걸 본 그녀는 표치수 흉내를 내며 댓글을 달았다.  (아래, 스티커 두 개가 붙어있는 댓글)


딸 아이의 문자


나의 글과 딸아이 문자를 보고 단 그녀의 댓글





여기서 애미나이가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 내 딸한테 하는 소리인지. 우리 둘 다한테 하는 소리인지는 그녀를 만나서 물어봐야 한다.


또 얼마 전 화이트 데이 때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위한 고디바 초콜릿을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내용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그랬더니 '쉿!~~~' 하는 댓글을 달아놓고 또 사라졌다.



나의 글에 단 그녀의 댓글



4. 눈물 천재


그녀는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날마다 많이 웃어서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며 보여준다. 그럴 때면 나는 내 팔자 주름을 들이밀거나 이마를 까서 보여준다.


"언니도 늙는구나."

"당근이지."


나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그녀의 눈은 순한 소의 눈을 닮았다. 그 소눈(소의 눈알)으로 나를 보며 울다가도 곧장 개그 본능 발동해서 웃겨준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울다가 또 정신없이 웃는다. 아줌마들의 주책 본능을 뼛속까지 탑재한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송도로 이사 오기 전까지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우리는 참 자주 만났다. 그리고 애들 학교에서 보육원 아이들의 멘토링도 같이 했었는데 그때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눈빛 만으로도 알았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기에 담당했던 아이에게도 진심을 다했다. 우리는 그냥 말 이외에도 서로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참 많았다.


그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로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지는 그녀. 그러나 어떤 날은 한없이 귀찮아짐을 느낀다는 그녀. 우리는 모두 갱년기에 훌쩍 접어들었다. 만나면 누가 누가 더 아픈지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다.


120세까지 사는 시대라고 말하면 '무섭다'고 대꾸하며 기겁을 하는 그녀지만. 나는 그녀가 그녀의 반짝이는 재능과 아이디어로 무슨 일이든지 새로이 시작해 주길 바란다.


세월을 고스란히 감당해낸 자연 그대로의 미인인지라 주름에도 기품이 있다. 그러면서도 눈물 많고 공감능력 뛰어나며 일도 소처럼 잘하고 재미도 있으며 굉장히 특이한 사람. 이런 사람은 어디에서나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배드민턴만 주구장창치며 코트를 누비는 그녀는 여간해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


'쉿!!! 나 그리 만만한 사람 아니거든.'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녀가 능력 발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전 04화 감정에 사로잡혀 남을 증오할 수는 없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