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불시착이 지난주 일요일에 끝났습니다. 남편을 따라서 뒤늦게 어쩌다 한편씩 보게 된 사랑의 불시착. 나중에는 시간 맞춰가며 보게 되었죠. 지금은 약간의 드라마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중이에요.
최근 10주 과정의 공부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거기에서 만난 한 선배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공부 모임만 아니었으면 집 나가서 현빈 쫓아다녔을지도 모른다고, 이 모임이 나를 집에 붙잡아둔 거라고 말이죠. 그 정도로 현빈이 연기했던 리정혁은 4-50대 아주머니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어요. 인정합니다.
얼마 전 현빈의 기사 밑에 '현빈은 언제나 넘버원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댓글 하나를 우연히 봤는데요. 이 댓글에 과거 기억 하나가 살며시 떠오르더군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년 전, 현빈 주연의 <하이드 지킬, 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현빈이 해병대 전역 후 곧바로 선택한 영화 '역린'은 관객수 400만 가까이를 기록했었죠. 그 후의 차기작으로 선택한 드라마가 바로 <하이드 지킬, 나>였어요. 군입대 직전의 드라마가 현빈 신드롬을 일으켰던 <시크릿 가든>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복귀작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었죠.
<하이드 지킬, 나>에서 현빈은 한 개의 몸에 두 개의 인격이 있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냉철한 재벌 2세 구서진과 다정다감한 로빈이 한 몸에서 지내며 낮과 밤을 달리해 나타나는,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려졌어요. 그가 두 개의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에는 어린 시절 유괴를 당하면서 겪게 된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을 했지요.
구서진은 철저히 냉정하고 방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데 여자 주인공 한지민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몸속의 착한 인격 로빈이 뛰쳐나와 구해주게 됩니다. 구서진은 또 다른 자신인 로빈을 싫어하지만, 로빈은 한지민을 사랑하여 자신의 존재를 계속 드러내길 원하고요. 결국 구서진도 로빈과 한지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제가 드라마 내용을 복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당시 이 드라마에 얽힌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현빈 주연의 <하이드 지킬, 나>가 방영되기 2주일 전, 타 방송국에서 <킬미 힐미>라는 드라마가 시작이 되었어요. 드라마는 워낙에 많으니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요. 이때만 해도 지금처럼 tvN이나 JTBC의 드라마들이 아주 다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공중파 드라마의 영향력이 꽤나 클 때였거든요. 그러니 방송사간 드라마 대진운이라는 것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테고요.
<하이드 지킬, 나>는 시청률 35%를 찍었던 <시크릿 가든>의 주인공 현빈의 화려한 복귀작이었고, <킬미 힐미>는 연기는 잘하지만 이미 유부남이 된 지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였어요. 둘 다 20부작이었는데 2주 먼저 시작한 <킬미, 힐미>는 현빈 주연의 <하이드 지킬, 나> 앞에서 무릎 꿇을 거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이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어땠을까요? 정반대였습니다. <킬미 힐미>는 어마어마한 골수팬을 양산하며 웰메이드 드라마에 등극했고 지성은 연기력을 인정받아 연말에 대상까지 타버립니다. 지성이 연기를 잘하니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며 넘어가도 되는 일이긴 해요.
그런데 <킬미 힐미>의 내용 역시 <하이드 지킬, 나>와 같은 다중인격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데에서 두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빈이 1인 2역의 역할을 했다면, 지성은 몇 술 더 떠서 1인 7역을 연기했어요. 지성이 맡은 역할은 한 개의 몸에 7개의 다른 인격이 있었거든요. 청소년, 성인, 중년, 여자까지 수시로 튀어나오는 다른 인물들의 향연이었습니다. 게다가 지성은 그 모든 인물들을 정말 찰떡처럼 연기해냈습니다. '연기의 신'으로 사람들이 떠받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요. <킬미 힐미>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제작진들이 애초의 주인공으로 '현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거죠. 하지만 현빈은 <킬미 힐미>를 거절하고 그와 유사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하이드 지킬, 나>를 선택했다고 해요. (미리 <하이드지킬,나>에 출연하기로 약속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절한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을 했죠)
<킬미 힐미> 제작진은 남자 주인공 캐스팅에 난항을 겪다가 첫 촬영 즈음에야 지성과 황정음을 캐스팅하게 됩니다. 사실 그 두 사람은 KBS에서 1년여 전에 방영된 웰메이드 드라마 <비밀>에서 한번 호흡을 맞춘 사이였거든요.
<비밀>에 이어 <킬미 힐미>까지 같은 남녀 주인공이 또다시 등장하는 드라마라니 너무 식상하지 않겠냐는 주변의 우려가 많았어요. 이런 우려들은 <하이드 지킬, 나>의 현빈에게 보다 유리하게 작용될 거라는 예상들이 지배적이었죠. 현빈이 또다시 <시크릿 가든>의 영광을 재현해 낼 거라고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흘러갔고 <킬미 힐미>가 너무 재미있다는 소문과 현빈이 거절한 작품이었다는 소문까지 겹쳐지면서 <하이드 지킬, 나>는 예상 밖의 고전을 면치 못하게 돼요.
현빈을 조롱하는 듯한 이야기들도 엄청 많았습니다. '현빈이 연기가 안되니까 1인 7역을 거절한 거다. 그런 역할은 '연기의 신' 지성만 할 수 있다. 현빈은 1인 2역이 한계다' 뭐 이런 종류의 댓글이 넘치고 넘쳐났었습니다.
저는 당시 현빈의 팬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드라마를 봐도 상관이 없었어요. 배우 공유가 나왔다면 모를까 현빈이라면 뭐 드라마가 재미있어야 보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드라마에 얽힌 뒷 이야기를 알고나자 <하이드 지킬, 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라도 봐서 시청률을 올려 주고 싶었거든요. 매회 드라마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현빈에게 살짝 빙의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현빈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고요.
'1인 7역을 거절하고 1인 2역 다중인격 역할을 선택했는데 하필 같은 시기에 드라마가 방영될 게 뭐람?' '그렇게 재미난 작품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 '거절한 작품이 내 거보다 잘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나 현빈이잖아. 내가 나오는데 시청률이 나쁠 수 있겠어?'등등.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청률 8%로 막을 내린 <하이드 지킬, 나>는 11%로 막을 내린 <킬미힐미>와 외관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요. 당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크릿 가든>의 후광효과와 해병대 자진 입대까지 한 모범적인 현빈이라면 시청률 20% 가까이는 올려줬어야 한다는 기대감이 컸으니까요. 어쨌든 이 작품은 현빈에게 유쾌하고 좋은 경험만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tvN의 <알함브라의 궁전>을 선택할 때까지 몇 년간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고 영화에만 출연을 했으니까요.
<하이드 지킬, 나> 이후의 영화인 <공조>는 유해진과 함께 출연을 했었는데 이때 현빈이 맡은 역할이 북한군 장교였죠. 우리나라로 도망친 원수 김주혁을 쫓아서 북에서 온 특수부대 출신 장교로서 유해진과 공조하여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8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지금껏 현빈의 영화 중 가장 좋은 스코어를 보였어요.
<하이드 지킬, 나>로 현빈의 연기력을 폄하하던 사람들은 <공조>의 북한 장교 역할을 보면서는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현빈은 '북한군' 리정혁으로 재탄생할 운명이었나 봐요.
현빈은 늘 최고였고,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시청률에서 압승을 거둔 '진짜 운 좋은 사나이'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이드 지킬, 나>의 이야기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매주 <킬미 힐미>의 골수팬들이 외치는 웰메이드 드라마 찬양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거절한 배역과 동시간대에 방송이 되어야 했던 <하이드 지킬, 나>의 현빈. 생각 많고 고민도 많았을 그 시기를 1인 2역, 구서진과 로빈으로 분하며 묵묵히 연기를 했을 현빈을 떠올려 보게 돼요.
그러면서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큰 성공 뒤의 예상 밖의 부진은 사람을 주눅 들고 기운 빠지게 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살아내야 하는 것. 그게 우리들의 몫인 거지요. 인생이 힘들때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걸 말이죠.
다시 한번 현빈의 명성을 높여준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 속 리정혁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는데요.현빈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시크릿 가든>에서처럼 까칠한 역할 말고도 다정다감한 역할이 무척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겁니다. 현빈 입장에서는 타율이 별로 좋지 않은 <하이드 지킬, 나>의 또 다른 인격 로빈이 '리정혁'의 복사판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로빈
리정혁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등장하여 해결해 주는 '리정혁'의 속에는 '로빈'이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하이드 지킬, 나>는 <킬미 힐미>에 비교되어서 패배한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불시착>의 다정다감한 '리정혁'이 탄생할 씨앗을 품고 있었던 드라마로 기억되어야 할 것 같아요.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브랜딩된 '리정혁'의 기원은 분명 '로빈'이 맞습니다.
저는 현빈의 팬도 아닌데 왜 이런 것들이 다 기억나는 걸까요? 아마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 같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을 좋아했던 모든 4-50대 아줌마들처럼 말이죠.
아참, 현빈은 북한군일 때가 포텐이 터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고로 영화 <공조 2>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공유의 <용의자 2>도 얼른 나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PS)
사랑의 불시착이 왜 재미있는지 이해 못하는 사춘기 딸아이지만 '도마도 재배자' 현빈의 예약 문자를 흉내내서 저에게 보내줍니다. 저를 사랑하여 제 상처에 후시딘 연고를 발라주겠다는 '후시딘 재배자'인 딸아이와 이제 함께 책 읽기에 돌입을 해야겠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은 끝났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