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여름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평의 쁘띠프랑스에 들렀다. 그날은 가평의 기온이 38도에 육박할 때였다. 딸아이가 꼭 가보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서 더위를 무릅쓰고 갔지만 금세 후회를 했다. 지면에서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 몇 발자국 떼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며 머리까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더운 날 꼭 바깥을 돌아다녀야 되겠어?'라고 반문하던 남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남편의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동그랗고 진한 무늬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를 실제 목격한 현장이었다.
더운 건 자기 탓이 아니지만, 더운 날 바깥을 돌아다니자고 한 건 자기 탓이라고 인정한 딸아이는 미안했던지 쁘띠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안내도를 펼치며 우리가 가야 할 곳들을 부지런히 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공연만 네 개를 보자고 했다. 전부 실내 공연이니까 제 딴에는 더위를 피할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각각의 공연장이 다 달라서 공연 시작에 맞춰 이쪽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저쪽 건물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어차피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지만 즐기기에는 솔직히 너무 더웠다. 하는 수 없이 만족의 기준점을 확 낮췄다. 즐기는 대신 서로 짜증 내거나 원망하지 않기. 절대 싸우지 않기. 시원한 곳으로만 골라 다니기. 우리의 목표는 단순했다.
한 실내 공연장에서 마리오네트 공연을 관람하고 연이어 시작되는 마임 공연도 보기로 했다. 마임 공연자는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마리오네트 공연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관객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그래서 뒤에 이어지는 마임 공연 역시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되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 잠깐의 휴식시간에는 선한 눈망울의 프랑스 마임 공연자가 무대 위로 나와서 관객들과 눈 맞춤을 하고 인사도 했다.
그 후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옷을 벗고 등장한 마임 공연자 때문에 조금 놀랐다. 날씨가 더우니 긴팔. 긴 바지는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라고 해도 공연을 직접 하는 그는 땀을 뻘뻘 흘렸다. 공연 도중 카펫도 뒤집어썼어야 했으니까.
잠시 후 마임 공연자가 관객의 모자를 살짝 벗겨서 자기 머리에 쓰는 퍼포먼스를 했다. 자신의 것과 바꿔 쓰기도 하고 관객에게 돌려주는 척 약 올리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 모자는 어느 중년 여성의 것이었다. 그녀는 공연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옆의 남편이었다. 그 남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공연 관람자이기보다는 감시자 같은 눈빛으로 마임 공연자를 쳐다보았다. 사실 소극장 공연의 경우는 대부분 공연자와 관객이 서로 행동을 주고받으며 소통을 한다. 그런 행위가 꺼려진다면 공연 관람을 하지 않거나 공연자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좌석에 앉으면 된다. 그런데 그 남편은 객석 제일 앞줄에 앉은 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마임 공연자에게 아내의 모자를 가져오라면서 손가락질을 까딱까딱하며 인상을 썼다.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마임 공연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인의 모자로 온갖 퍼포먼스를 다 펼쳤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에야 돌려주었다. 그 남편의 표정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러다 공연장에서 싸움이 나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마임 공연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곧장 주머니에서 분무기를 꺼내 들고는 관객들을 향해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또 관객들의 의자 사이사이를 밟고 지나다니고 관객들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기도 했다. 하다못해 나중에는 관객들 무릎에 드러눕기도 했다.
딸아이는 '비호감'이라고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공연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의 행동은 황당했지만 재미있었기 때문에 관객들 모두 깔깔대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분노 폭발 일보 직전이던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끌고 중간에 나가 버렸다. 모자를 빼앗겨서도 약이 올랐는데 분무기 물세례까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거다.
중간에 불쾌한 내색을 하며 나가버린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임 공연자는 능청스럽게 공연을 했다. 공연을 계속 해오던 그 긴긴 시간 동안 공연자는 별별 관객들을 다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관객들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연자가 관객 반응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공연을 즐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을 다 보고 나오면서 아쉬움이 컸다. 관객 5-60명 남짓 두고 하는 소공연. 38도가 넘는 찜통더위에 두꺼운 카펫을 온몸에 둘둘 말고 열정적으로 공연을 하는 타국에서 온 이방인. 그에게 그토록 매몰차게 군 남자 관객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일에는 과한 기대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아주 작은 기대 정도는 하면서 살아가는 게 삶을 활기차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관객이 열심히 공연하는 공연자를 위해 박수와 웃음으로 호응해 주는 정도의 작은 기대. 그것도 욕심일까? 그 정도의 배려도 못 해줄 정도로 우리는 삭막하게 살아야 하나? 아니, 이 모든 게 뜨거운 날씨 탓이었을까?
공연을 관람하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한여름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묵묵히 걸어서 다음 코스를 향해 가다 보니 어릴 때 손들고 벌서던 기분이 들었다. 또 '800미터 달리기'를 4분 남짓 안에 통과하려고 죽기 살기로 뛰던 고등학교 시절도 생각났다.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부분도 떠올랐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하게 해 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실제 20년이나 되는 긴 수형 기간 동안.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엮은 책이다. 가족과 이웃과 세상에 대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옥중 더위를 '형벌 중의 형벌'로 표현하신 부분을 보면 더워서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단지 덥다는 이유로 곁에 있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수감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내 감정에 못 이겨 누군가의 기운을 빼앗아 버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부당한 증오'를 떨쳐 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증오를 남발하는 스스로를 보며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공연을 보는 관객의 신분일 때는 물개박수치며 환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공연 관람의 자세 정도는 지키며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내 인생 마지막까지 있었으면 좋겠다. 38도 더위로 땅도 하늘도 불타 녹아내릴 것 같이 뜨겁던 그날. 한 번 더 결심했다.
'단지, 덥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증오하진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