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탈 때마다 궁금했었다. 몇 년 전부터 가끔씩 사라지던 선반이 이젠 점점 더 줄어드는 것만 같다. 어쩌다 한 번씩 타는 전철에서 선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선반이 없어요!'라고 쓰여있는 노란색 테이프를 보게 된다.
여전히 선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짐을 무심코 올리다가 좌석에 앉은 사람 머리 위로 떨어뜨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그린 그림도 같이 붙어 있다.
선반 대신 있는 모니터. 네가 선반을 대신할 수 있을까???
여태까지 없던 것이 새롭게 눈에 보이는 날에는 "앗, 이런 게 생겼네." 하고 쉽게 넘어가는데 지금껏 있었던 것이 사라지면 "누가 없앴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사라진 거지?" 하며 이유를 묻게 된다.
선반을 없앨 당시 결정을 한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지하철 좌석 위쪽의 선반이 사라지면 무거운 가방은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은 무거운 가방을 들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복잡한 지하철을 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선반을 없애고 뉴스가 나오는 화면을 그 자리에 붙여 놓은 걸까? 손 안의 스마트폰을 보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방영되는 모니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안전하고 쾌적한 객실 환경을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선반을 없앤 지하철을 새롭게 들이는 중이라고 한다. 화재나 재난이 발생할 때 탑승객의 시야 확보와 대피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선반 없는 지하철을 계획한다는 관계자들의 이야기가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선반이 지하철 중간중간 목석처럼 버티고 서있는 장애물이라면 또 모를까. 지하철 지붕 근처에 붙어있는 선반이 탑승객의 시야 확보를 어렵게 하여 동선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는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그냥 선반이 싫고 모니터가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결정해 버린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안전하고 쾌적한 지하철 내부를 위해 선반을 없애 버리면 춥거나 더울 때도, 지치거나 힘들 때도 승객들은 무거운 가방을 벌서듯 어깨에 멘 채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가방이나 짐은 지하철 바닥에 놓으면 된다고?'
이런 답변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비나 눈이 와서 지하철 바닥이 젖었다면, 새로 산 가방이 아까워서 바닥에 놓고 싶지 않다면... 여지없이 어깨에 메고 버텨야 한다.
출퇴근 시 지옥철이라 불리는 노선들이 있다. 그 지옥철 속에서 앉지도 못한다면 제대로 서기라도 해서 직장에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지 않을까?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선반' 대신 '선반'의 부재를 알리는 '노랑 테이프'가 나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불편한 상황을 일부러 만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오는 전철을 타다가 낯선 광경을 만났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인천행 전철의 스크린 도어에는 실종아동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수십 년 전 실종 당시의 모습을 인공지능이 유추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그려낸 사진과 함께 말이다.
인공지능이 실종 아동의 미래 모습을 예측, 스크린도어에 설치해 놓았음.
스크린도어 앞에 서서 전철이 오는 시간까지 한 명 한 명의 어릴 적 모습과 이름, 특징을 눈에 담았다. 수십 년 세월을 건너뛰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그들의 어른스러운 모습도 기억하려 애썼다. 혹시라도 눈 어두운 내가 지나가다가 만나게 될 사람이 그 혹은 그녀일지도 모를 일이니...
이미 성인이 되었어야 할 수십 년 전의 실종 아동들을 보면서 불과 몇 분 전 지하철 선반이 사라진 이유를 캐내려던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선반이 사라졌을 때 느낀 불편한 감정과는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는 가슴 찢어지고 갈라질 듯한 아픔을 실종 아동의 가족들은 평생 느끼며 살아가고 있겠구나 싶으니 그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니까.
항상 있던 '존재'나 '대상'이 사라지면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이유'를 묻게 된다. 선반이 사라져 버린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유'가 납득이 된 이후에야 '존재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지하철 실내 유지를 위해서'와 같은 납득이 안 되는 이유는 사라진 선반의 존재감만 더 크게 키울 뿐이다.
아동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사라졌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가족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존재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언젠가 다시 품으로 돌아올 날을 희미하게라도 기약하고 싶어 한다.
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무겁고 지친 마음으로 실종 아동의 미래를 상상해 보곤 했을까. 본인들의 삶을 할퀴어 가며 서로의 가슴을 물어뜯어가며 얼마나 수많은 자책의 밤을 지새웠을까.
그들은 지친 마음을 어느 선반 위에도 올려놓지 못한 채 양쪽 어깨에 짊어지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삶에도 힘겨운 짐을 벗어 올려놓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선반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존재'를 떠올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각박한 삶 속에서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부려 놓을 수 있는 선반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고맙고 편안한 '선반'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