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아홉 명 모이는 모임에 가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두 세 명 있고 또 나를 처음부터 괜히 싫어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다. 나머지는 나에게 관심도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상처 받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행동을 한다고 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회 초년병 시절, 나를 싫어하는 타인의 존재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들곤 했다.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나 이유 없는 배척을 당할 때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 자책도 했다. 그와 동시에 나를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간 상대방을 증오했다.
그러나 우리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과 더 친해지고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며 지내왔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누군가를 불편해하고 미워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상식 이하의 행동은 하지 않을 정도의 아량과 교양은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인간됨이고 인간의 도리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가끔씩 쪽지나 블로그의 비밀 댓글에 '악플을 받아서 너무 속상한데 당신은 그런 적 없나요?'라는 질문이 달린다. 속상해하는 사람에게 그와 유사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큼 효과 빠른 위로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 이 글을 써서 포스팅으로 올리고 링크를 걸어드렸다. 위로가 되었다는 분들의 댓글로 오히려 내가 더 큰 위로를 받았다.
브런치 조회 수 1일 10만 회의 폭발이 일어났던 작년 어느 날.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한 문제의 포스팅 거의 마지막에 달린 댓글이 악플이었다. 악플의 요지는 '너처럼 개념 없는 인간의 글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내 눈에 절대 띄지 마라.'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린 지 2년 가까이 되면서 기분 언짢은 댓글을 서너 개 정도 받아 본 것 같다. 그중 최고로 기분 나쁜 악플이었다. 다음 메인화면에 걸려 조회수가 요동치는 뜻밖의 기쁨을 겪은 만큼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돌팔매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브런치는 내게알려주었다.
악플에도 나름의 단계가 있다. 내가 올린 글 자체에 비판을 가하면서 나에게 따끔한 주의를 주며 가르치려는 악플, 단순 비교에 입각하여 내 글 속 사소한 부분까지 시시콜콜 딴지를 걸며 비난하는 악플, 그냥'나'라는 인간과 내가 쓴 글이 너무 싫으니 썩 꺼져버리라는 악플. 악플을 읽다 보면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그걸 쓴 사람의 수준과 심리상태가 보인다.
악플러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사람들이 맞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사연을 넘나들며 들고 있는 날카로운 꼬챙이로 일단은 전부 들쑤시고 본다. 상대방이 찔려서 피나면 좋고, 피가 안 나도 최소한 찔린 자국이라도 생기면 기쁘다.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들이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모두와 함께 웃을 수 없는 자, 타인이 울어야 겨우 웃을 수 있는 자.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당시 나는 그 악플을 나의 글 밑에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글 쓰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기에 정신 바짝 차리고 제대로 된 글, 읽어서 유용한 글을 쓰라는 댓글 선생님들의 날카로운 충고라고 여기려 했기 때문이다. 악플을 보면서 내 글의 문제점이나 고칠 점을 떠올려 개선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딸아이가 볼까 봐 지웠다. 엄마한테 누군가가 함부로 악플을 달았다는 걸 알게 되면 딸아이가 더 바르르 떨며 분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정신건강을 위해 삭제했다. 악플에서도 깨달음을 얻어 좋은 글을 써보겠다는 내 결심은 가상했으나 좋은 선플을 봤을 때가 글이 더 잘 써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기에. 그 악플을 나의 글밭에서 시원스레 걷어 치워 버렸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사실을 배웠다.
타인에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의 입장까지 배려해 주면서 살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살 필요가 있다.
나를 응원하고 따뜻한 조언을 들려줄 사람들이 주위에 꽉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더 바람직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며 악플러의 이야기까지 귀담아들을 이유는 없다. 그렇게 나의 한정된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좋은 사람의 좋은 이야기, 좋은 사람이 들려주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 거라는 확신이 있다. 고로 무분별한 비난 일색의 악플, 이유 없는 트집과 질시, 어처구니없는 험담에 흔들리지 않을 거다.(때론 흔들리겠지만 즉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할 것이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속에는 헤이터의 기본값이라는 글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반응이 열에 여덟은 호평일 때 나머지 둘은 악평이고, 내가 지루해하던 영화의 반응 역시 호평 8: 악평 2로 똑같았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영화를 보아도 사람들마다의 감상이 모두 다르며 부정적 평가 역시 기본값으로 항상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헤이터의 기본값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려 애써도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세상 모두가 나를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욕심이고,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을 떠올리며 내 존재를 갉아먹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자해행위이다.
악플을 다는 사람은 나의 글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독설을 내뱉고 다닐 것이다. 공개글을 쓴다는 건 언제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 글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접하며 내 생각을 점검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악플은 내 생각을 개선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영향력 있는 댓글이 아니다. 말의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며 나를 가차 없이 베어버리려는 악플러를 만나면 신속한 댓글 삭제와 함께 신고를 해야 한다. 악플러를 만난 나쁜 운은 그렇게 끊어내야 한다. 두고두고 바라보며 곱씹으면 안 된다. 내 생각은 그렇다.
허지웅 작가는 "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결국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시체가 된다"라고 말했단다. 역시 허지웅 작가답다.그 얘기를 듣다가 공감하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는, 나를 싫어하고 나를 무시하고 나를 비난하는 타인에게까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세상에 온 게 아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오로지 내 삶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 내가 애를 써야 할 일이 있다면 내 마음을 최우선으로 가꾸는 것이어야 한다. 제대로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내가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모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를 닦달하는 인기 많은 시체는 되지 않을 예정이다.
나는 기꺼이 사랑을 주고 기쁘게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사랑 많은, 그래서 나이 들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