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LeeHa Oct 22. 2019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다

이것도 모르냐는 말은 금지어


친구랑 만나면 하는 이야기


친구 중 한 명은 20여 년 전쯤 미국으로 갔어요. 대학원 공부를 마치면 돌아올 줄 알았는데요. 취직도 결혼도 다 그곳에서 하다 보니 한국에 들어올 일이 없게 된 거죠. 어쩌다 한 번씩 한국에 옵니다. 그러면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는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 말을 하게 돼요.


친구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 걱정이 많아요. 친구는 남매인데 오빠도 미국의 타 지역에 살거든요. 둘 다 공부를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직장을 구한 케이스여서 삶의 본거지가 미국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 한국에는 부모님 두 분만 남아 계세요.


20년 동안 자식 둘을 만나러 몇 번씩 미국에 가시기는 했지만 한국을 떠나서 사실 생각은 없으셨나 봐요. IT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휴대폰이며 PC, 그 외 전자 기기 작동법을 손쉽게 물어볼 수 있는 자식이 곁에 없다는 건 두 분께 상당히 불편한 일이었을 겁니다.  



친구는 아이패드를 사서 부모님께 드리며 스카이프를 시도하고요. 휴대폰과 PC로 공인인증서 깔아서 은행 업무 보시는 방법, 인터넷 쇼핑하는 방법, 앱 설치 등등 어쩌다 한 번 한국 들어올 때마다 설명을 드려요.


근데 친구의 열정만큼 부모님이 못 따라 하시는 거죠. 80세 넘은 부모님들께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이 가혹할 정도로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친구가 각종 방법들을 종이에 써 드리고 시범도 보여 드리지만 부모님께서는 돌아서면 깜빡깜빡 잊어버리십니다. 그때마다 친구는 답답하다고 해요. 그럼 저는 제 딸아이 초등 때 수학 공부 가르쳐주고 영어 단어 암기시키려다가 머리에 불붙었던 얘기를 들려줍니다. '네가 내 심정 같겠어?' 그러면서 말입니다.


몇 년 전의 우리는 80대의 부모님과 10대 자녀의 모자란 이해력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하소연을 하곤 했었죠.  

"아, 이 쉬운 걸 왜 몰라?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러면서 누가누가 더 모자란가 대결이라도 하듯이 서로의 부모님과 서로의 자식의 단점에 대해 줄줄이 나열하며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쩜, 이런 것도 모른다니..." 그러면서요.

그때 했던 저희들의 이야기. 그건 잘난 척이었을까요?

어디 가서 잘난 척할 데가 없으니까 가족 앞에서 잘난 척 한 더 모자란 사람들이 바로 '친구와 저' 였던 걸까요?

이게 바로 '지식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실험을 통해서 본
'지식의 저주'



1990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뉴턴은 한 실험을 합니다. 그룹 1과 그룹 2로 나누어서 그룹 1의 사람들에게만 당시 유행하는 노래를 들려줘요. 그리고 노래의 리듬을 떠올릴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게 합니다. 그 소리만으로 그룹 2의 사람들이 유행가의 제목을 맞출 수 있는가를 알아봅니다.


그때 그룹 1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탁자 두드림만으로도 그룹 2의 사람들 대부분이 유행가 제목을  맞출 것이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노래니까 최소 50%의 사람들은 맞출 거라고 예상했지만요. 결과는 단지 2.5%의 사람들만이 노래 제목을 알아맞혔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을 남도 알고 있을 확률은 2.5%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어떨까요? 그럼 '상대방의 모른다는 반응'에 훨씬 너그러워질 것 같기도 합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현상. 인식의 왜곡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지식의 저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알게 되면 그것을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의 상태를 상상하기가 어려워져요. 이미 알고 있는 '나'는 모르는 '남'의 심정까지 알아서 살필 수도 없어요. 우리는 마음까지도 바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안타깝게도 살필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해만 하는 거죠.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거나 배려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말입니다.



지식의 저주를 대신할
그것은....



예전에 음악을 좋아하는 한 지인이 저에게 어떤 가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당연히 제가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계속 말을 했는데 제가 못 알아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가끔씩 그 사람이 저를 한심하게 봤던 눈빛이 생각납니다. 


각자의 다양한 관심분야는 오로지 그 사람 고유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자신이 관심 갖고 잘한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 없고 모르는 사람한테 집요하게 이야기하거나 모른다고 무시하는 태도는 대체 어디로부터 온 걸까요? 자신감일까요, 자만심일까요?


기분이 나빴던 '그 경험' 덕분에 제가 관심 갖는 무언가를 타인에게 주입하듯 말하고 몰아붙이는 일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어요. 


미국에서 온 제 친구 역시 그 정도의 상식은 있는 현명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굳게 다짐한 저나 현명한 제 친구는 왜 부모님과 자식의 일에서는 '지식의 저주'가 또다시 발동이 되는 걸까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면서 말이지요.


친구는, 80대 노인 두 분이 일상에서 누군가에게 속지 않을 만큼만 정보를 익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친구가 오빠랑 공부하러 간 사이 부모님 두 분께는 많은 일이 있었는데요. 순진한 부모님들이 사기를 당하기도 하셨고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마음고생도 하셨어요. 긴 시간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멀리 있는 자식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으셨죠. 자식의 입장 생각해서 할 수 없으셨을 거예요.




제 경우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나니까요. 담임교사가 누구냐에 따라서 천지 차이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떤 해에는 '창의적인 아이'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어떤 해에는 '자기 주관만 센 고집불통 아이'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찍혀 버리면 영어 단어 3개 이상 틀린 날은 집에서 7시 40분에 집을 나가 학교에 8시까지 도착하여 재시험을 봐야 했지요. 제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교육방식입니다. 


저와 아이는 둘 다. 강요하면 튕겨나가는 성향을 지녔어요. 누군가가 억지로 무엇을 시킨다고 해서 차분하고 고분고분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최소한 그 일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어야 하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 일을 시키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아무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도 저희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절대 못해요.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으니까요.  


그러니 복불복으로 아이를 이해해 줄 담임교사 만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저는, 아이가 점수로 불평등함을 겪는 일만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봐준 적이 있었어요. 타인이 우리 아이에게 가하는 '지식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제가 결단을 내린 자구책 속에서 저 역시 제 아이에게 '지식의 저주'를 쏟아내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간과한 사실이지요.




긴긴 시간 후회와 상처와 깨달음을 얻은 제 친구와 저는 '가족'에게 잘난 체 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가족을 타인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보호하겠다며 훈계와 잔소리를 일삼았는데요.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했죠.  


오늘 이 순간 웃고 행복해야 할 가족에게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을 투사해서 '지식의 저주'를 퍼붓는 짓은 하지 말자고도요. 우리는 선생님이나 강사가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과 아이들이 밖에서 상처 입고 들어오면 그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족'으로서만 남으려 합니다.  


가족 각자의 인생에 주어진 일정량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져 보겠다고 애쓰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면 더 불행한 일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이 앞에서 더 이상 '잘난 척' 하지 않아요. 수학이랑 과학 문제 풀어주면서 '이것도 모르냐?'라고 큰소리치던 몇 년 전의 저는 죽고 없습니다.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 게다가 다 잘할 필요도 없다. 배우기 싫으면 안 배워도 된다. 대신 어느 날 문득  배우고 싶은 그 무엇이 생긴다면 네 모든 걸 다 걸고서 해라!'


그렇게 말해요.

.

.

.

그런데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공부 가르쳐주며 '지식의 저주'를 부리던 그때보다 더 부담스러운 모양입니다. 컥.




이전 05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스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