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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의 불편한 진실

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by 연글연글




결혼 후,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아온 우리는,
퇴직을 하고 보니 정리되는 살림이 꽤나 단출하더라.

​두 아이 키우면서
집 한 칸 대출 갚으며
밥 먹고 사니까 끝이었다.
그나마 빚을 지지 않고 살아온 게 감사할 일이다.

​남편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직장에서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아왔음에도 말이다.

​나는 나대로, 적은 보수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모니터 아르바이트며, 아이들 과외 지도를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나의 무능함이라면
부동산 재테크나 투자 등에는 관심 없이
그저 안 쓰고 덜 쓰고 아낄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남편의 정년이 다가올수록
넉넉지 않은 노후 걱정으로 생각이 많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월 200만 있어도 둘이서 충분히 산다'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내 가슴을 더 답답하게 했다.

​생활비, 관리비, 보험금, 약값, 각종 이용 대금의 고정 지출과 움직이면 들어가는 부수적인 비용들을 얼추 계산해도 꽤나 빡빡한데 말이다.

​게다가 매일 집안에 틀어박혀
외출도 안 하고 밥만 먹고살 수는 없잖은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거나, 가족 행사에도
여유 비용은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남편은 은퇴하고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쉬고 싶어 했다.


남편과 나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다르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됐다.

​남편의 능력이나 나이로도, 벌써부터 사회생활을 단절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까운데
본인의 뜻이 확고하니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물론 일자리가 있는데 안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예 재취업을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형편이 허락하는 선에 맞춰 살면 된다는 게
남편의 주장이다.

​나는 가진 형편에 맞추기만 하는 수동적인 삶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작은 경제 활동이라도 계속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망설이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 고운 빛깔의 옷도 사 입고,
때가 되면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가족들이 모이면 맛있는 것도 마음껏 사주고 싶었다.


하고픈 게 많아서 경제 활동이 절실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그저 가만히 앉아 눈만 껌뻑이며 흘려보낼 순 없다.
무엇이든 찾아 나서고
작은 일이라도 시작해 보면
뜻밖의 곳에서 길이 열리기도 한다.


일단, 시작이 중요하다.

​지금 나이에 돈 십만 원은
젊을 때의 그것과는 체감하는 무게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일, 저 일, 여기저기에
작은 금전의 씨앗이라도 소중히 심어 본다.


작은 열매들도 차곡차곡 모이면
내 생활에 커피가 되고, 새 옷이 되고, 사랑하는 손녀의 선물이 되기도 한다.

​중년 이후의 삶에도
경제 활동과 사회생활이 계속된다면
전두엽에는 적당한 자극이 되고,
몸과 마음에도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노후 계획이 다르니
각자의 스타일대로 살고 있다.


좀 더 일찍 준비하며
함께 방향을 맞췄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몰랐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인생의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흐를 줄은.

​이렇게 빨리 은퇴 부부가 돼 있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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