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한의 선택이 자유일 수 없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꿈꾸지만, 과연 그 자유는 무엇을 의미할까?
청춘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인의 자유와 미성숙한 아이의 자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자유롭지 않다”는 감각은 단순한 제약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는 자각에서 오는 것이다.
‘단순한 방종이 아니라, 책임지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오는 것’
궁극적인 자유에 도달한다면 당연히 크나큰 책임도 잇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된 지금도 자유를 미루고 있는 까닭은, 보호받는 것이자 억눌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에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개성? 생각? 개인적인 모든 것이 묵살되는 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 그저 사회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범죄자 양성과 다름없다 믿는다.
사회유지가 힘들어질 것이다. 무제한적인 선택은 자유가 아닌 자유를 표방한 방치에 불과하다 믿는다.
사실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린 자유를 두려워한다,
일정한 틀 안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며 사회 규범으로 그 기준을 정해 놓는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서는 서로의 자유의 충돌이 잦기 때문이다.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아무 때나 노래를 부를 자유가 있다”라고 해도, 그 노래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된다면, 그 자유는 침해가 아닌 피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유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아는 절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존’이 필수적인 것이다.
공존 없는 자유는 결국 무정부 상태가 되어간다.
그래서 자유는 늘 타인과 함께 쓰는 공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유를 조율한다는 건, 오히려 내 자유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자유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경계’가 생길 때 비로소 자유가 나타난다.
누군가 나를 억압해야, 자유가 생긴다.
절제는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 아닌, 자유의 일부이다. 자유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지를 아는 것이 절제이다. 자유롭기 위해 자제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 필수 조건이라 믿는다.
사람들은 무제한적인 자유를 겁내고 ‘규범과 경계’를 스스로 세우기도 한다.
그 두려움의 본질은 고립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무책임한 무한적인 자유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공존’이란 것이, 단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자유가 맞물리며 서로를 지탱해 주는 상태도 있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서로의 자유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관계가 그 예다.
작게 이야기하자면, 자유롭게 말하는 것 자체를 놓고 말해보자. 집단적 독백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건 독백이지 대화가 아닌 것이다. 말할 자유와 듣는 자유가 서로를 가능하게 해 줄 때,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상대방의 표현 자유를 가능케 해 주고, 그로 인해 나도 더 깊이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내 자유를 실현하는 방식이, 타인의 자유도 지지해야 시너지가 난다는 것이다.
자유를 ‘내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공존 안에서 순환되는 에너지’로 이해하는 사고다.
그렇기에 진정한 자유는 혼자 외로이 설 때보다, 서로 연결될 때 더 깊이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고민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를 원하는 것일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