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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Aug 28. 2022

[짧툰 8화] 나, 놀아도 되니...?

언제부터인가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나, 놀아도 되나...?

 

 언제부터인가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놀이는 비생산적이자 비실용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소득 없는 일’은 그저 낭비이고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짬이 나 쉬게 되면, 다음 노동을 위한 충전이라며,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곤 했다. 생존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일은 내게 있어 죄다 쓸 데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 한 코너에서 ‘루미큐브’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것이었다. 사 볼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곧 돌아서고 말았다. 2만 원이라니 너무 아까운데, 그나저나 2만원 어치의 이득은 가져다 줄까? ‘1분’의 시간을 효용적으로 써서 ‘가치있는 무언가’를 생산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회사 동료의 위자 위 구겨진 노란 담요에, 궁서체로 쓰인 글귀를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던 적이 있다. 김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은품이었다.


 그러게, 고작 라면 한 끼 먹자고 이 발악을 하는 건가 싶어, 옆자리 동료를 끌어안고 광광 울고 싶어졌다.


 남의 사업 불려 주는 우리 월급쟁이들이야 그렇다 치자. 오롯이 자신의 발상으로 창작해내는 사람들의 밥벌이는 과연 신성할까? ‘폴 오스터’라는 작가가 쓴 <빵 굽는 타자기>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돈이 열리는 나무 주위를 돌면서 춤추라는 부추김이 거듭되었고, 사람들은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발작적인 정신착란으로 픽픽 쓰러져 죽어갔다.”


  평생 밥벌이나 하다가 끝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만큼 시시한 것도 없다. 어느 날은 한 TV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다, 갑자기 뒤통수를 탁!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성악가인 ‘조수미’ 씨의 인터뷰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펼쳤던 자선 사업 ‘휠체어 그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조수미 씨는, 내내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장애 아동들에게 놀이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휠체어와 함께 탑승할 수 있는 그네를 여럿 설치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돈이면 굶어 죽는 아이들이나 병마와 싸우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었을텐데 기껏 선택한 것이 휠체어 그네라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과연, ‘생존’을 최우선으로 돕는 것만이 숭고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장애아에게 있어 ‘놀이’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인가? 아마 배부른 소리라고,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밥을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놀이도 꿈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숭고한 권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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