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가 주인공이라니 동화 아니면 우화일 것 같아 기대된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하루 중 ‘해 질 녘’을 뜻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 질 녘에 프랑스 양치기들 사이에서 유래된 프랑스어 표현으로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대를 나타낸다 (출처: https://blog.insilicogen.com/71).’
시적이며 낭만적인 스토리텔링까지. 발상이 기발하기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을 것이다.
오후 5시에서 7시 즈음 지구는 노랗고 빨간빛을 담은 둥그런 종이 상자가 되는 것 같다. 사위가 어두워지지만, 상자의 허술한 면면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수만 가닥의 빛을 막을 수는 없다. 줄기는 혼자 외따로 나오는 법이 없다. 손에 손잡고 춤을 추며 나온다. 빛들은 다발로 서로 엮여 그러데이션처럼 너울진다. 묘하게 선 긋는 무지개와는 달리, 모두가 원만하게 섞인다. 채도와 명도가 모두 달라, 똑같이 겹치는 색이 없다. 밝은 코발트 빛깔도, 보랏빛도, 그들의 보색인 주황색도, 붉은색도 모두 담겨있는 하늘이다. 그 명랑한 빛깔들이 서로에게 섞여들며 마침내 검은색이 되고 마는 것을 아쉬워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개가 늑대가 되기도 하고, 늑대가 개가 되기도 한다. 양가 극단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두 극점을 모두 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의와 악의가 뒤섞인,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실망하면서도 기대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시간이다. 명도가 서로 다른 회색의 인간들을 상상하다 보면, 김금희의 소설 <복자에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양심 없고 민폐 끼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주인공에게, 상대방이 이렇게 답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게 사람이지요.” 죽어라고 밉기만 한 어느 놈(?)에게도 사랑해 줄 구석 하나쯤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아닐까?
개 또는 늑대의 존재와 실체 여부는 이야기에서 이미 중요하지 않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음과 동시에 죽어있는 것처럼. 정말이지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날이 저물수록 희붐한 꽃의 빛깔이 선명해진다. 예쁜 것이 다른 예쁜 것으로 갈음한다. 라일락, 목련 따위의 꽃나무가 뿜어대는 향기는 작년 이맘때를 상기시킨다. 해 질 녘의 끄트머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다니 대견해. 김금희의 소설 <크리스마스 타일>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오늘은 노력한 날 아닌가. 노력이 중요하다. 어떻든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해.”라고.
늦저녁엔 구겨진 마음을 빳빳하게 풀 먹이고 다려내야지. 개들도 늑대들도 완전히 사라진 뒤엔, 그 모든 노력들마저 내려놓은 채 순순히 잠에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