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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Mar 11. 2023

Q. ‘두려움’하면 떠오르는 것은?

A. ’당신의 두려움을 길들이라 (Tame Your Fear)’

인도 회사 ‘니포 배터리(Nippo Battery)’의 광고 카피: ’당신의 두려움을 길들이라 (Tame Your Fear)’라는 광고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예전에 우연히 보았던 이 광고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후 구글 검색을 통해 찾아보았는데, 자료가 거의 없었다.



나의 두려움은 너무 주책맞아서, 시도 때도 없이 야단법석을 떤다. 불길한 냄새를 맡으면 0.1초 만에 튀어나오니 다스릴 틈이 없다. 날뛰는 두려움을 길들일 수 있다니, 얼마나 통쾌하고 후련한 발상인지.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두근, 복직근, 대흉근 등의 근육을 천천히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두려움을 ‘조련’하는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게으른 의식이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인지 회로’의 방향을 바꾸어, 새롭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섬세하고 교묘한 기술, 예를 들어 ‘인지치료’라는 전문적인 스킬까지 필요할 정도라고 한다. 외과 수술 같은 방법도 없으니,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Tame Your Fear!”를 외치는 순간만큼은 짧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경지에 달하는 길은 매우 요원해 보인다.


모든 것에는 유용성이 있게 마련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만 외따로 빼놓고 ‘만수산 드렁칡 얽어진들 어떠하리’하며 사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토끼는 사자를 경계하여 언제나 도망갈 채비를 해야만 한다. 다만 사자의 입속에서 으스러지는 망상에 시달리며 내내 종횡무진하는 모습은 바보 같을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에너지 소비가 매우 심하다. 들숨 날숨 두려움이 드나든다면 체력이 달려 기절하고 말 것이다. 두려움이 심해지면 ‘불안장애’로 진화한다. 이렇게 되면 일상에 쏟을 여력을 상당히 빼앗기고 만다. 일과를 꾸역꾸역 마치면,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진 채 눌어붙어 버리고 만다. 아니, 그것마저도 불안의 원인이 되고 만다.


나에게도 ‘불안 장애’가 있다. 내 힘으로 수습불가한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지레 겁이 난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압도당하면 ‘불안장애계’의 끝판왕 ‘공황발작’까지 납신다.


나의 신경 정신과 주치의는 두려움을 ‘호랑이 그림’ 즉 실체 없는 종이 쪼가리에 비유하였다. 아무리 그림이라도 그렇지, 시뻘겋게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의 눈을 마주치기는 무섭다. 실사에 가까운 그 그림이 허상임을 납득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년, 아니 십수 년, 수십 년.

시야가 좁아 아직 화폭까지는 보지 못한다. 지금으로선 꼼짝없이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는 수밖에. 설사 실체이더라도 손전등 뒤 과장된 고양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때론 궂은 괴수의 그림들이 한바탕 바람에 흩날려 가기도 한다. 빛바랜 종이들을 바라보며, 저따위 것에 사로 잡혔던 나의 어린 날들을 개탄하고 한탄한다.


어린 왕자에서는 ‘길들임’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책임을 지는 것. ‘저것은 이러할 거야’하며 대상을 뭉뚱그리는 나의 나태를 경계해야겠다. 두려워하는 대상을 구체화하고, 그 대상과 나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해야겠다. 내가 만든 두려움이니, 마땅히 내 선에서 책임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 ‘용기냄’이 ‘두려움을 길들인다’의 진짜 뜻은 아닐까. 옹송그린 나의 등을 철썩 때리며 말한다. 좀 더 능동적으로 살란 말이야, 이 바보야.

 

그러니 Dare to be Fear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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