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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Mar 16. 2023

Q. 가장 질투 나는 사람은?

A.  내 옆의 당신


‘부러움’과 ‘질투’는 확연히 다르다. 부러움은 인정이자, 동경이자, 존경이다. 나는 당신을 이길 수 없소, 하며 순순히 배를 까며 항복하는 것이다.


질투는 ‘너의 잘남을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이다. 무시받아야 마땅한 자가 더 가졌을 때의 분개이다. 그를 질투하는 자신을 향한 혐오와 증오, 그리고 수치이다. 이어서 내가 이런 저질스러운 감정을 가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절대 질투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릴 백만 가지 이유를 찾아낸다. 덧붙여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났다는 시시콜콜한 증거들도.


나의 질투 대상은 원거리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탐나는 필력을 가지고 있는 구병모 작가님도 아니고, 세계적인 이야기꾼 조앤 롤링도 아니다. 쓰는 작품마다 족족 히트를 치는 김은숙 작가님도 아니다. 실력과 지위의 격차가 너무 심한 나머지 따라잡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오히려 주변 근거리 내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질투한다. 같은 공간을 쓰는 사람,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 관계가 가까운 사람.


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센스가 좋은 옆 자리 과장님을 질투한다. 바로 내 옆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지망생을 질투한다. 1억 도 아닌, 단 돈 몇천 원짜리를 지갑에 가진 고만고만한 사람들을 질투한다. 개중에는 내 열등감을 유독 자극하거나 각성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경우 나의 질투는 더 히스테릭해진다. 가끔 아니 자주 샤덴프로이데 증후군을 보이기도 한다. ‘샤덴프로이데’란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뜻하는 독일어 표현이다. 그래, 쌤통이다. 넌 나보다 뛰어날 수 없는 사람이잖아, 그렇지? 응?


치부를 드러냈다. 혹시 나만 그런 걸까? 자신의 영역 안 비슷한 사람들끼리 질투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었던가? 이 미묘한 심리를 콕 짚어낸 가수 장기하 님의 관찰력은 얼마나 뛰어난가.


노래 1. <별일 없이 산다>: ‘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노래 2. <부럽지가 않아>: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질투의 감정이 일 때는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좋을까. 상대방을 ‘객체화’ 하는 것을 그만 두면 된다. 상대의 전인격을 편파적으로 보고, 피상적으로 판단하며, 부분적인 특징만 근거 삼는 것을 그만두자는 뜻이다. 아래 장기하 님의 노래를 다시 한번 인용한다.


노래 3. <그건 니 생각이고>: ‘내가 너로 살아봤냐? 네가 나로 살아봤냐? 아니잖아. 그냥 니 갈 길 가. 이러쿵저러쿵 뭐라 해도 상관 말고.’


<그건 니 생각이고>의 가사처럼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그 사람이 내 인생을 살아본 것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 은밀한 열등감을 품고 있을 것이다. 시샘과 질투를 할 수밖에 없는 건, 그러기에 사람이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졸하게 쪼그라진 마음의 주름마다 가끔 햇볕과 바람을 쏘여 줄 필요는 있다 (마음의 쪼그라짐은 얼마나 견디기 힘든가).


다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이해해야겠다. 앞으로 나의 질투는 ‘뺄셈’이 아니라 ‘덧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못 가졌고, 나에게 무엇이 빠져 있고’에 대한 집념을 버리자. 대신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며 더하는 방법을 취해야겠다. 우리끼리 암만 겨루고 싸우고 깎아내려 무엇하랴.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이곳 개울 저 너머에는 바다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너와 내함께 바다로 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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