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대답하는 정도이니, 휴식공간으로서 집의 중요성은 말해 무엇하랴.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친구처럼, 과묵하고, 다정하며, 소탈한 공간이어야 한다. 함께 있고 함께 존재해도 어색하지 않은 침묵처럼 말이다.
한때 일본에서 ‘단샤리(斷捨離)’ 열풍이 분 적이 있다. '단샤리'란 일상에서 필요 없는 것을 끊고(斷), 불필요한 물건을 과감히 버리며(捨), 물건에 대한 집착과 이별(離)하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것으로 ‘미니멀라이프’를 들 수 있겠다. ‘단샤리’나 ‘미니멀라이프’의 목표는 집안을 가득 채운 쓸모없는 물건을 모두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 두는 것이다. 산뜻하고 개방된 공간을 만듦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머릿속의 산란한 생각까지 비워낼 수 있다고 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이 더 풍요로워진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정갈하다. 정도를 지키는 삶이다.
그런가 하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쥐고 놓을 줄 모르는 ‘맥시멀리스트’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온갖 잡동사니들 위로 먼지가 켜켜이 쌓여갔지만, 환기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한번 정리하긴 정리해야 하는데’ 하는 부담감이 무거운 추처럼 매달려 있었다. 체한 마음의 처방은 대청소였지만, 이걸 언제 다 치우나 하는 생각에 매번 미루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없이 두려워져 이불속만 격하게 파고들었다. 인간 두더지가 따로 없었다.
철이면 철마다 옷, 장신구, 가방 등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싶었다. 그 욕망은 부지불식 ‘꼭! 필요해’라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익숙해지고, 싫증이 났다. 소유했다는 만족감은 채 세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처박힐 자리조차 찾지 못한 것들은 발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물질의 바닷속에서 물장구치듯 발로 휘휘 물건을 치워내면, 엉덩이 붙일 공간은 생겼다.
필요해서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건과 맞바꾼 과거의 ‘돈’이 아까웠다. 10년 전 어느 해쯤 유행했던 옷들은 이미 매몰된 비용을 볼모로 교활하게 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도금이 벗겨지고 낡아 빠진 액세서리들을 보니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계륵조차 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나눠보니 크게 두 가지 유형의 물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과거’의 추억을 기념한답시고 버리지 못한 물건, 두 번째는 ‘미래’ 언젠가의 쓸모에 대비하여 간직해 둔 물건이었다. 단기간을 전후로 쓰였던, 혹은 곧 쓰일 ‘현재 진행형’의 물건은 정작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은 물건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라며 껴안고, 영원히 오지 않을 ‘언젠가’를 기다렸다.
물건 정리의 전문가들은 버릴까 말까를 영 결정하기 어려운 때에는 1) 임시로 그 물건을 버려 보라고 조언한다. 즉, 집구석 어딘가 임의의 ‘쓰레기 보관함’을 만드는 것이다. 버릴지 말지 애매한 물건들을 당분간 그곳에 보관한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은 버려 버린다. 2) 내일 당장 이민을 간다면 꼭 가져갈 물건을 추려보는 방법도 있다. 3)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이 들 때에는 버리는 것이 맞다!
타고난 게으름뱅이는 없는 법. 어느 날은 그 죽은 놈들을 과감히 ‘쓸어 담았다’. 실연당한 여자가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내게도 어떤 감정적 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쓰지 않는 스킨케어 제품은 모조리 쓰레기봉투행. 악명 높은 2002년의 옷, 낡은 신발, 녹슨 집기들, 자리만 채워주던 물건들과도 미련 없이 안녕. 과연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는데 막상 해보니 끊고, 버리고, 이별하는 카타르시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꼭 필요했던 물건들이 아니었다. 왜 그리 절절한 미련이 필요했나 싶었다. ‘제법이잖아, 진작 할 걸, 할 수 있었잖아, 바보야!’
지금 나의 방은 이전보다 단출하다. 큼직한 덩어리는 아래와 같다.
1. 빛을 철저히 차단하는 암막 커튼
2. 커다란 갓 아래 따뜻한 주황빛을 내는 스탠드
3. 기본 스킨케어 용품과 매일 쓰는 화장 도구만을 갖춘 월넛 화장대
4. 단순한 디자인의 월넛 침대
5. 하얀 이불보와 하얀 베개
6. 미니 월넛 책장과 월넛 책상
7. 블루투스 스피커
8. 향초, 아로마가습기, 미니 스탠드 등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소품들
아직 모두 비워내지 못했다. 가끔 새로운 물건이 추가되기도 한다. ‘일단은’ 이만큼이면 되었다, 싶은 수준으로 유지하련다. 많고 적고, 절대적인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좋고, 머물기 편한 공간이면 된다. 꼭 끼는 외출복을 벗어 버리고, 편안하고 넉넉한 옷으로 갈아입는 정도의 기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공기를 순환시키듯, 주기적으로 물건을 비워 내기로 한다. 알고 보니 물건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물건으로 인해 좀이 쏠던 내 정신 건강이 더 아까운 것이었다.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斷), 하루 간 누적된 스트레스를 버리며(捨), 잡념과 쉽게 이별(離)할 수 있는 공간은 매일의 끼니처럼 필수적이다. 웰빙 라이프를 위해 이만큼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