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다시 피어난 우리의 계절

겨울 끝에서 다시 움트는 마음들

by 연빈

웅이가 큰 사고를 겪은 그 겨울 이후
우리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마음 한쪽에 작게 남은 통증을 품고 살아갔다.

겉으로는 회복된 듯 보였지만

웅이는 밤마다 손끝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잠을 설치곤 했다.
아픈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고
늘 웃는 얼굴로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그 말 뒤에 숨겨진 힘겨움은
곁에 있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웅이는 아들 빈이와 몸으로 씨름을 해주고,
간식 챙겨주고, 장난도 걸어주었다.
빈이가 “아빠 또 해봐요!” 하고 달려들면
표정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다친 손을 슬쩍 피하며 아이에게 맞춰주곤 했던 사람.
그 모습이 고맙고도 짠해서 나는 밤마다 몰래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계절을 몇 번 더 보내던 어느 해,
이제는 어느새 나보다 훌쩍 키가 커버린 연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연이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몸을 배시시 틀며 조용히 말했다.

“엄마… 나… 그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순간 나는 얼떨떨했고,
웅이도 멀뚱한 얼굴로 연이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어쩐지 조금 아린...
묘한 감정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야기했었다.
주위에서 “딸 첫 생리할 때 아빠가 생리대 선물하는 거야”
라고 들은 웅이가 그 말을 은근히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연이가 그날이 오면… 내가 준비해야지.”
하며 혼자 다짐하듯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막상 그날이 찾아오자 웅이는 기쁜 마음과 함께
“조금만… 조금만 더 천천히 자라주면 안 되나”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고 했다.


그날 퇴근길,

웅이는말도 못하게 큰 박스에 생리대를 가득 담아 들고 왔다.
너무 티가 날 정도로 큰 상자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연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웅이의 얼굴에는 어쩐지 자랑스럽고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박스 안에는 생리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웅이가 작은 꽃다발까지 함께 넣어두었던 것이다.
첫 생리를 축하하는,
딸이 소녀에서 여자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을
아빠로서 정성껏 준비한 마음이었다.

연이는 결국 환하게 웃으며 웅이 품 안으로 쏙 안겼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왔다.

누가 봐도 이제 ‘여자’가 된 연이가 대견했고,
동시에 ‘아직 내 품에서만 놀던 그 작은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마음을 서늘하게 흔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참 빨리 자란다.
나는 중학교 때 처음 생리를 했는데...
연이는 벌써 이렇게 자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게 사춘기가 슬며시,
조용히 우리 집 문 앞에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하나둘 꺼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의 모습을...

유치원 시절, 용돈 사건.
서울 친정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외할아버지가 용돈이라며
연이에게는 만 원 한 장,
빈이에게는 천 원 다섯 장을 주셨던 날.

차 안에서 잠시 기뻐하던 연이의 표정이
어느 순간 어두워졌던 그때...

“연이야, 왜 그래? 표정이 왜 그래?” 하고 묻자
연이가 한참 고민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왜… 나한테 더 적게 줬어요…?
빈이는 다섯 장인데… 나는 한 장이잖아요…”

그제야 우리는 연이가 아직 돈의 가치를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던 연이.
그 옆에서 ‘나는 다섯 장이야!’
하며 만세 하듯 웃고 있던 빈이.

지금 떠올려도 웃음이 터지는 그 장면.


그 아이들이 이제 이렇게나 컸다.
서로를 챙기고,
아빠의 아픔을 헤아리고,
자기 세상을 넓혀가는 나이가 되었다.


웅이가 아팠던 그 겨울 이후
우리 가족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다시 피어오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가족의 계절은 언제든 다시 피어난다는 것을.


PS. 연빈의 여정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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