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에게 쓰는 편지

015

by 한량돌

안녕 도이야! 이야-

해가 바뀌고서야 편지를 쓴다. 몸은 성하니?

난 오랜만에 코감기 걸려서 정신이 몽롱해.

감기 조심하렴.

지난 편지에 제주도를 가게 되었다고 전한 지,, 벌써 5개월 차야.

짧지 않은 시간인 만큼 기억에 남을 만한 여러 일들이 있었어.

-

일단 약속한 대로~ 11월 제주의 사진이야.

20251106_094449.jpg
20251106_090229.jpg
20251106_093418.jpg


가서 이것저것 했는데 가장 기대했고 좋았던 건 역시 한라산 등반이었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이번이 등반 4회? 5회? 차 더라고?

그런데도 한라산은 항상 설레. 그런 마음으로 그 만의 남다른 식생을 눈에 마음껏 담았어.

특히 백록담 안에서 하얀빛의 사슴(노루겠지? 아무튼 그쪽 과 애들) 무리를 봤는데

이야,, 그 순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뻥뻥 터지는 거야.

언젠가 잠깐은 제주도에 내려와서 마음껏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올해가 가기 전에 최소 2주? 한 달? 그렇게 한 번 살아봐야지.

까짓 거. 가능할 것 같아.

탐라의 시선에서 풀어나가는 그 시절 이야기라니 아, 신난다.

정말.. 멋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글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

분명 금방 질려버릴 테지만,, 하고 싶은 거니까 해볼 거야. 전업 작가처럼.

혹시 알아? 그런 글쓰기 환경이 나에게 찰떡이어서 내가 막 미친 듯이 글을 쓰는 거야.

그 글의 질도 탁월하고 말야.

뭐? 알아 나도. 멍소리라는 거. 그냥 그런 꿈을 꿔 봐..

-

육지로 돌아와서 조금 있다가 충남 부여를 가게 됐어. 2주 간의 지역살이 체험으로.

(오, 길게 떠나는 삶의 서막이 열린 거야.)

20대 때 처음 시골로 내려갔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 달랐어.

11월인데도 볕이 참 따뜻했어. 사람은 더 따뜻했고.

책임 없는 쾌락,, 노는 마음으로 잠깐 산 거여서 더 그랬을 걸 알지만서도..

난 부여에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와우!

1764060786709.jpg 산은 산이요 물은...

그랬던 만큼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거를 허유.. 이번 달까지 질질 끌면서 썼네. 난 여유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절대 아님.

그래도 포기 안 하고 결국 끝까지 써냈어. 그게 중요한 거지.

https://brunch.co.kr/@yeondol/77

아니 근데 나 달리기 할 때도 ‘주파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완주만 생각하자. 절대 걷지만 말자.’

이렇게 생각하고 뛰거든? 근데 10km를 한 시간 잡고 천천히 뛰면 오히려 무릎하고 허리가 더 아파.

때에 따라 적당히 치고 나가는 것도 분명 필요한 겨. 그 감각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래 맞아. 자주 뛰고, 자주 쓰면 알게 될 거야. 형은 충분히 총명하니까.

아, 그리고 부여에 있을 때 생각했던 건데, 너의 이야기보다 <사로 이야기>를 먼저 퇴고해야 할 것 같아.

너는 나랑 평생 같이 갈 주인공이라서 장편이 될 수밖에 없잖아.

거기 붙잡혀서 이렇게 저렇게 구상만 하다가 나 금방 마흔 살 될 것 같거든? 맞아. 핑계야. 게을러서 그렇지.

일단 스핀오프, 곁가지로 사로가 주인공인 단편을 빨리 만들어야겠다 싶어.

이유는? 허접한 결과물이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생각보다 더더더더 중요하더라고.

공모전에 내볼 수도 있고, 도움 받을 기회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지 않겠어? 본편이 연재가 안 되어있는데 속편이 먼저 나온다는 게.

훗날 만약에 만약에 생겨난 내 소설 팬이 ‘.. 이런 식으로 연결한다고? 허허껄, 작가 웃기는 놈이네.’하면 기분이 째질 것 같단 말이지.

암튼 중요한 건 이거지.

다시 시작할게! 소설 쓰기.

부담 가지지 말고 습관화부터. 아자!

-

꿈같던 부여 시절이 끝이 난 뒤 12월 초에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어.

손가락으로 세어보니까 독립하고 나서 다섯 번째 집이네.

20251205_130329.jpg 안녕?

여기서 부여 내려갈 돈과 실력을 쌓으려고 해.

처음 부여 버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전투력이 상당해서

내려가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거든.


포케 장사 하고 - 밴드도 하고 - 글도 쓰고 - 가정도 일구고 해야지~

했는데 밖에서 또 몇 달 구르다 보니까 꿈이 많이 축소됐어. ㅋㅋㅋ...

아이고 언제 철 드나. 변경된 진행 상황은 종종 전할게.

-

같이 살게 된 동거인을 하루 만에 버리고(!) 짐을 챙겨 고양으로 도주했어.

오래 사귄 동기 하나가 파주에서 마트를 열었거든.

하루 이틀 바쁜 그를 도와주다가 기어이 그 앞에서 장사를 했어. (???)

장사를,, 석 달 조금 안 되게 한 것 같아.

새로운 경험에 미치는 사람이라, 군침이 싹 돌더라고.

처음 보는 고깃 조각 조금 던져주면 바로 이 맛 아입미꺼 하고 달려드는 거지.

나도 대체로 내 선택이 웃겨. 걱정스럽고..

그래서 슬슬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안 찍어 먹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나도 나이를 먹고 있으니.. 그렇겠지.

그래도 너는 이런 형을 응원해줘야 해. 내가 감각하는 만큼 너의 이야기가 풍성해질 거야.

실제로 메모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이번 겨울에만 해도.

,,, 알았어 임마. 썩기 전에 얼른 상에 낼게.

다시 장사 얘기로 돌아가서, 많은 돈은 못 벌었지만

맛있게 한다는 평가를 꽤 많이 받았어. 단골도 어느 정도 생겼었고.

무엇보다 부여에서 음식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났기에

식재료 발주 및 관리 같은 기본적인 운영이나 마케팅, 홍보 등의 외적인 것들을 소소하게나마 경험해보고 싶었어.

자꾸 초점이 바뀌어서 뿌리가 실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떻게든 내 식대로 성장할 방법을 찾는 거겠지.

붕빵연구소 로고 (배경지우기).png 라식해서 눈 좋은데 컨셉 지킨다고 매번 안경쓰고 장사했음

재밌는 건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까 기회가 종종 생겨.

붕어빵 장사 시기만 해도 그래.

어떤 마트 사장님이 와서는 ‘붕어빵 괜찮게 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다. 여기보다 자리 좋은 곳이 있는데 거기서 같이 해보자.’는 기분 좋은 스카웃 제의를 받아보기도 하고

예전에 같이 살던 군대 동료가 몇 년 전에 식당 두 곳을 개업해서 멋지게 잘 꾸려나가고 있는데, 걔가 ‘형 식당 하고 싶으면 우리 가게 와서 일하면서 이것저것 배워 봐.’라고 품을 내어주기도 했어.

내 실력과 지갑과 정신 상태가 그 기회들을 잡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자잘하지만서도 소름 돋는 기회들이 몇 번은 있었는데.

자신 있게 손에 쥘만한 내공이 없어서 모른 채 했었던 것 같아.

부끄럽네. 아니 안 부끄러워. 아니, 모르겠어.

내공. 실력. 탁월함. (그리고.. 안정?) 이젠 그런 것들을 좇아야 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하는 거지 뭐. 계속하는 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너무 알고 있잖아.

하자. 해.

-

3월이다. 붕어 장수를 그만두고 드디어 이삿집으로 내려왔어.

이젠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지.

아, 잠시만요? 여행으로 겨우내 고인 땟국물 좀 먼저 씻어내고.

동거인과 일본 홋카이도 동부로 여행을 갔어. 4박 5일?

어땠냐고? 아마 몇 번은 더 갈 것 같아. 초록과 생동이 넘치는 홋카이도 궁금해.

어땠길래? 말도 마. 별 일 다 겪었어.

출국 당일에 ‘선비는 뛰지 않는다.’는 심보로 온갖 여유는 다 부리다 생각보다 청주공항까지 오래 걸려서

탑승 30분 전에 겨우 도착해서는 추적추적 비 오는 날 캐리어 들고 겁나 뛰어가서 카운터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탑승하고

둘째 날엔 숙소에서 술 먹고 기분 좋아가지고 온천하다가 세숫대야 찌그러뜨려서 다음 날 변상하고

넷째 날 아침엔 바다 보러 가려고 괜히 차 끌고 눈길 진입했다가 빠져가지고 동네 농부 할아버지가 트랙터로 꺼내주고

마지막 날 공항 돌아오는 길엔 왼 편에 보이는 바다가 너무 예뻐서 과속했다가 (대체 무슨 연관?) 일본 경찰한테 잡혀서 다시는 그러면 안 돼요 한국안녕 도이야! 이야-


해가 바뀌고서야 편지를 쓴다. 몸은 성하니?


난 오랜만에 코감기 걸려서 정신이 몽롱해.


감기 조심하렴.



지난 편지에 제주도를 가게 되었다고 전한 지,, 벌써 5개월 차야.


짧지 않은 시간인 만큼 기억에 남을 만한 여러 일들이 있었어.



-


일단 약속한 대로~ 11월 제주의 사진이야.






가서 이것저것 했는데 가장 기대했고 좋았던 건 역시 한라산 등반이었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이번이 등반 4회? 5회? 차 더라고?


그런데도 한라산은 항상 설레. 그런 마음으로 그 만의 남다른 식생을 눈에 마음껏 담았어.


특히 백록담 안에서 하얀빛의 사슴(노루겠지? 아무튼 그쪽 과 애들) 무리를 봤는데


이야,, 그 순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뻥뻥 터지는 거야.



언젠가 잠깐은 제주도에 내려와서 마음껏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올해가 가기 전에 최소 2주? 한 달? 그렇게 한 번 살아봐야지.


까짓 거. 가능할 것 같아.


탐라의 시선에서 풀어나가는 그 시절 이야기라니 아, 신난다.



정말.. 멋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글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


분명 금방 질려버릴 테지만,, 하고 싶은 거니까 해볼 거야. 전업 작가처럼.


혹시 알아? 그런 글쓰기 환경이 나에게 찰떡이어서 내가 막 미친 듯이 글을 쓰는 거야.


그 글의 질도 탁월하고 말야.


뭐? 알아 나도. 멍소리라는 거. 그냥 그런 꿈을 꿔 봐..



-


육지로 돌아와서 조금 있다가 충남 부여를 가게 됐어. 2주 간의 지역살이 체험으로.


(오, 길게 떠나는 삶의 서막이 열린 거야.)


20대 때 처음 시골로 내려갔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 달랐어.


11월인데도 볕이 참 따뜻했어. 사람은 더 따뜻했고.


책임 없는 쾌락,, 노는 마음으로 잠깐 산 거여서 더 그랬을 걸 알지만서도..


난 부여에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와우!


산은 산이요 물은...


그랬던 만큼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거를 허유.. 이번 달까지 질질 끌면서 썼네. 난 여유로 글을 쓰는 사람은 절대 아님.


그래도 포기 안 하고 결국 끝까지 써냈어. 그게 중요한 거지.


https://brunch.co.kr/@yeondol/77


20화 노닐고 싶어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50. 부여 2주 살이 | 노! 는! 게! 제일 좋! 아! # 함께하면 좋을 배경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fVxm3b04jlc&list=RDfVxm3b04jlc&start_radio=1&t=645s <comfortable autumn [ lofi mix / chillhop / chill beats ] work / study music>


brunch.co.kr/@yeondol/77


아니 근데 나 달리기 할 때도 ‘주파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완주만 생각하자. 절대 걷지만 말자.’


이렇게 생각하고 뛰거든? 근데 10km를 한 시간 잡고 천천히 뛰면 오히려 무릎하고 허리가 더 아파.


때에 따라 적당히 치고 나가는 것도 분명 필요한 겨. 그 감각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래 맞아. 자주 뛰고, 자주 쓰면 알게 될 거야. 형은 충분히 총명하니까.



아, 그리고 부여에 있을 때 생각했던 건데, 너의 이야기보다 <사로 이야기>를 먼저 퇴고해야 할 것 같아.


너는 나랑 평생 같이 갈 주인공이라서 장편이 될 수밖에 없잖아.


거기 붙잡혀서 이렇게 저렇게 구상만 하다가 나 금방 마흔 살 될 것 같거든? 맞아. 핑계야. 게을러서 그렇지.



일단 스핀오프, 곁가지로 사로가 주인공인 단편을 빨리 만들어야겠다 싶어.


이유는? 허접한 결과물이라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생각보다 더더더더 중요하더라고.


공모전에 내볼 수도 있고, 도움 받을 기회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지 않겠어? 본편이 연재가 안 되어있는데 속편이 먼저 나온다는 게.


훗날 만약에 만약에 생겨난 내 소설 팬이 ‘.. 이런 식으로 연결한다고? 허허껄, 작가 웃기는 놈이네.’하면 기분이 째질 것 같단 말이지.


암튼 중요한 건 이거지.


다시 시작할게! 소설 쓰기.


부담 가지지 말고 습관화부터. 아자!



-


꿈같던 부여 시절이 끝이 난 뒤 12월 초에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어.


손가락으로 세어보니까 독립하고 나서 다섯 번째 집이네.


안녕?


여기서 부여 내려갈 돈과 실력을 쌓으려고 해.


처음 부여 버프 받아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전투력이 상당해서


내려가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거든.




포케 장사 하고 - 밴드도 하고 - 글도 쓰고 - 가정도 일구고 해야지~



했는데 밖에서 또 몇 달 구르다 보니까 꿈이 많이 축소됐어. ㅋㅋㅋ...


아이고 언제 철 드나. 변경된 진행 상황은 종종 전할게.



-


같이 살게 된 동거인을 하루 만에 버리고(!) 짐을 챙겨 고양으로 도주했어.


오래 사귄 동기 하나가 파주에서 마트를 열었거든.


하루 이틀 바쁜 그를 도와주다가 기어이 그 앞에서 장사를 했어. (???)


붕어빵 장사를,, 석 달 조금 안 되게 한 것 같아.



새로운 경험에 미치는 사람이라, 군침이 싹 돌더라고.


처음 보는 고깃 조각 조금 던져주면 바로 이 맛 아입미꺼 하고 달려드는 거지.


나도 대체로 내 선택이 웃겨. 걱정스럽고..


그래서 슬슬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안 찍어 먹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나도 나이를 먹고 있으니.. 그렇겠지.



그래도 너는 이런 형을 응원해줘야 해. 내가 감각하는 만큼 너의 이야기가 풍성해질 거야.


실제로 메모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이번 겨울에만 해도.


,,, 알았어 임마. 썩기 전에 얼른 상에 낼게.



다시 장사 얘기로 돌아가서, 많은 돈은 못 벌었지만


맛있게 한다는 평가를 꽤 많이 받았어. 단골도 어느 정도 생겼었고.


무엇보다 부여에서 음식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났기에


식재료 발주 및 관리 같은 기본적인 운영이나 마케팅, 홍보 등의 외적인 것들을 소소하게나마 경험해보고 싶었어.


자꾸 초점이 바뀌어서 뿌리가 실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떻게든 내 식대로 성장할 방법을 찾는 거겠지.


라식해서 눈 좋은데 컨셉 지킨다고 매번 안경쓰고 장사했음


재밌는 건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까 기회가 종종 생겨.


붕어빵 장사 시기만 해도 그래.


어떤 마트 사장님이 와서는 ‘붕어빵 괜찮게 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다. 여기보다 자리 좋은 곳이 있는데 거기서 같이 해보자.’는 기분 좋은 스카웃 제의를 받아보기도 하고


예전에 같이 살던 군대 동료가 몇 년 전에 식당 두 곳을 개업해서 멋지게 잘 꾸려나가고 있는데, 걔가 ‘형 식당 하고 싶으면 우리 가게 와서 일하면서 이것저것 배워 봐.’라고 품을 내어주기도 했어.


내 실력과 지갑과 정신 상태가 그 기회들을 잡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자잘하지만서도 소름 돋는 기회들이 몇 번은 있었는데.


자신 있게 손에 쥘만한 내공이 없어서 모른 채 했었던 것 같아.


부끄럽네. 아니 안 부끄러워. 아니, 모르겠어.



내공. 실력. 탁월함. (그리고.. 안정?) 이젠 그런 것들을 좇아야 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하는 거지 뭐. 계속하는 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너무 알고 있잖아.



하자. 해.



-


3월이다. 붕어 장수를 그만두고 드디어 이삿집으로 내려왔어.


이젠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지.


아, 잠시만요? 여행으로 겨우내 고인 땟국물 좀 먼저 씻어내고.



동거인과 일본 홋카이도 동부로 여행을 갔어. 4박 5일?


어땠냐고? 아마 몇 번은 더 갈 것 같아. 초록과 생동이 넘치는 홋카이도 궁금해.


어땠길래? 말도 마. 별 일 다 겪었어.



출국 당일에 ‘선비는 뛰지 않는다.’는 심보로 온갖 여유는 다 부리다 생각보다 청주공항까지 오래 걸려서


탑승 30분 전에 겨우 도착해서는 추적추적 비 오는 날 캐리어 들고 겁나 뛰어가서 카운터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탑승하고


둘째 날엔 숙소에서 술 먹고 기분 좋아가지고 온천하다가 세숫대야 찌그러뜨려서 다음 날 변상하고


넷째 날 아침엔 바다 보러 가려고 괜히 차 끌고 눈길 진입했다가 빠져가지고 동네 농부 할아버지가 트랙터로 꺼내주고


마지막 날 공항 돌아오는 길엔 왼 편에 보이는 바다가 너무 예뻐서 과속했다가 (대체 무슨 연관?) 일본 경찰한테 잡혀서 다시는 그러면 안 돼요 한국 아저씨 소리 듣고. 아니 무슨 도로가 제한이 죄다 60이야.

그래도.

참. 좋았다.

처거운 3월의 오아시스.

1772984910184.png

-

이건 변명이 아니야.

나 진짜 돌아와서 금방 다시 일하려고 했어.

근데 일 구한 곳에서 인사 담당자가 자꾸 서류를 누락시키는 거야.

팀장이란 놈은 뒤늦게 연락해서는 남 탓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일을 왜 그렇게들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일 할 사람이 되게 많은 가봐.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걸 보니까.

연이은 취업 지연 상황에 잠깐 방황을 했어. 계획하고 또 틀어지는데..

장사 경험의 일환으로 식당 쪽으로 일자리를 구하다가 (다행인 건지) 적절한 곳이 없기도 하고

요식업 자체가 주말 녹고, 내 시간 녹는 느낌이라.. 한 이틀 열심히 구직하다가 문득 자신이 없어졌어.

밥 벌이 하기 위해서 실력 키우는 거? 물론 중요해. 근데 난 못 견딜 거야. 또 어둠 속으로 들어가라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감각이 충만해지는 장소. 그 순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필요한 사람인데.

적어도 지금은 식당일 아니다 하고 다시 기존 계획으로 돌아왔지.

그러다가 전에 연락했던 팀장이 전화가 왔어. 잘 챙겨드렸어야 하는데 상황이 이래서 미안했다고

다음 주에 자리 하나 열리는데 다른 쪽 보지 말고 저희 쪽에서 같이 하시자는 거야.

아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왜 이러는 걸까. 사람 안 귀한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초짜한테까지 이러나..

싶다가도 조건이 괜찮아서 ‘그래, 며칠만 더 기다렸다가 일 시작하자.’하고 또 며칠을 백수로 살았지.

약속 당일이 됐어. 먼저 신입 교육을 받고 신체 검진도 받아야 해서 알려준 주소로 갔지. 나 말고도 세 명이 와있더라고.

약속받은 시간이 조금 지나더니 카톡이 틱 오더라.

입사 서류 누락으로 또 교육이 밀렸다고. 죄송하다고. 이건 사람 기만하는 거잖아. 아니 왜???

강아지아이들. 얼이 빠지더라. 교육받으러 온 사람 중에는 새벽부터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도 있더라고.


차로 가서 가만히 멍 때리고 앉아있었어. 사람이 이렇게까지 호구 잡히면 다른 데 알아봐야 맞잖아. 업체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유.. 근데 일주일만 더 기다리기로 했어. 나도 참..

이 현장은 어딜 가나 이런 취급받는 상황일 것 같기도 하고.. 팀장이란 놈이 사정사정하니까 또 참아지더라.

아.. 이러면 다음 달 또 대출 엔딩인데.. (글을 돌아보니까 무슨 떳떳지 못한 일이나 다단계처럼 터무니없는 영업직 그런 걸로 읽히는데 그런 일은 아니고 그냥 몸으로 많이 때우는 일이야. 안심해. 산업 전사! 산업 역군!)

-

편안하지도 그렇다고 힘들지도 않은 3월이 이렇게 가고 있어.

동거인이 금전적으로는 도와준다니까 어떻게 살긴 하겠는데.

살다 살다 이렇게 오래 노는 건 처음이네.

하염없이 길어지는 구직 기간에 밀쳐져서 자꾸 방황하게 돼.

어떤 날은 미친 듯이 바깥 활동량을 늘려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몇 년 만에 게임을 켜서 하루 종일 가상의 서부에서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해.

어제는 몸이 완전 부서져서 종일 넷플릭스를 보다가

오늘은 노래 들으면서 동네를 3시간 정도 걸어 다녔어.

이렇게 방황하면 일 시작하고 분명 후회할 건데.

시간 많았을 때 해야 하는 것들 좀 충분히 해둘 걸 하고.

그렇게 바라던 여유로운 시간이 와도 결국은 그저 관성대로~살던 대로 사는구나.

사람이란 게 그렇지.. 라고 하기엔 아우,


내 삶이 너무 아깝다.

일어서자.

하고 싶고, 그래서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자.

-

몇 달 만에 연락하는데 푸념만 죄- 널어놨네.

몇 번이고 별말 없이 잘 들어줘서 고마워.

나한테는 네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조만간에는 반짝이는 소식 넣은 편지를 부치도록 해볼게.

잘 지내고 있으렴!



화면 캡처 2026-03-17 004129.png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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