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인생일력' 데일리 명언 에세이 2 : 2021년 1월 2일
관 뚜껑이 덮여야 인생사 끝나는 것
뱃속의 기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노수신
<건원 연간에 동곡현에 부쳐 살면서 지은 노래>
2020년을 생각하면,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들로 우왕좌왕해온 기억이 가장 많이 남는 것 같다. 이번 새해에서는 '건강하세요'라는 인사가 연례적인 것이 아닌, 진심과 우려가 담긴 말이 되었다. 코로나 19가 처음 터지고 1~2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을 시기만 해도 온 국민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과 곧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고 하루 확진자가 1천 명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1월부터 참아왔던 분통이 터진 것 같다. 작금의 상황을 볼 때마다 과연 이 국가시스템과 경제상황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이다.
은영이는 새해로 넘어가기 전 몇몇의 지인들에게 새해 안부전화를 돌리고자 마음을 먹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더 주변의 안부가 궁금한 것이다.
은영이의 20대는 연극으로 호기롭게 먹고살아보려고 했으나 세상이 소수의 예술인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사실을 그나마 일찍 깨달아 운 좋게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 근무한 지 5년 차가 되었다. 올 한 해 은영이는 수시로 코로나 19 비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갑자기 확진자수가 늘어나면서 다시 닥쳐온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는 예전에 그녀와 함께 동고동락하였고, 지금도 간간히 무대 위에 오르면서 주 생계로 예술강사일을 해왔던 동료나 선배, 후배들을 조여왔다. 핸드폰을 열어 카카오톡의 친구 목록을 넘겨보다 보니 극장의 문이 닫히고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그들이 배달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갑자기 전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은영이는 며칠 전에 중점, 일반관리시설 특별 점검 명령으로 시내 식당과 카페 시설 점검을 하러 갔었고, 점검을 하면서 그들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기휴업상태로 있거나, 문을 곧 닫을 것이라고 말한 업주도 있었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카페 사장의 표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이었다.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을 망설이고 있던 찰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만나는 과 선배였다.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은영은 선배의 한 마디가 꽂히게 되었다.
은영은 말했다.
"선배님, 코로나 19가 정말 심해진 것 같아요. 이러다가 모두 다 망할 것 같아요. "
그 말에 선배는 수화기 너머 대답했다.
"괜찮아, 이럴 때는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이렇게 다 같이 힘든 상황에는 이 상황이 풀리면 또 금방 다 같이 일어설 거야. 인류가 항상 전쟁이나 전염병 사태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잖아. 오히려 일부만 망하게 되면 다시 그들이 소생하기 힘들지만, 다 같이 힘든 상황에는 위기를 극복할 때 다시 뭉치게 되어있어."
은영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안심이 되었다. 학부시절에는 같이 무대에 올랐던 선배 중에 가장 빨리 전공을 버리고 편입학을 하여 경영을 전공하고, 지금은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 지긋지긋한 전염병에도 아랑꼿 하지 않고 탄탄하게 버티고 있는 중견기업에서 아쉽지 않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선배의 말이 안심이 되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왠지 내년에는 이 재앙이 금방 종식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은영은 알았을까. 이것이 배부른 자의 여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관 뚜껑이 덮어야 인생사가 끝나는 것'이라고 시를 썼던, 당쟁의 직접 피해자로 20년간 억울한 귀양살이를 했던 노수신이 그 문장을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억울함과 절망의 시간을 그는 뱃속에 품고 있던 기개로 버텨왔나 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은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자신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기개와 소신인 것 같다.
노수신(1515 ~ 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을사사화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귀양살이를 하였다. 선조 즉위 후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문집에 《소재 집》이 있다. (출처 네이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