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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Feb 09. 2021

고귀한 문장을 대하는 태도

민음사 '인생 일력' 데일리 명언 에세이 3 : 2021년 1월 3일

과거의 문장들은 비록
오래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체득하게 되면 
나날이 새로운 것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심조룡  





 "관 뚜껑이 덮여야 인생사 끝나는 것. 뱃속의 기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네."  


선아는 노수신의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뱃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명언은 시간을 관통하고, 시대의 문제를 통괄한다. 선아는 최근 큰 사건은 아니지만 연말 동안 자잘하게 부딪친 일들로 매일 불평을 늘어놓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저 송곳과 같은 문장이 자신의 나약함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떤 문장은 자신의 삶을 풍부하고 말랑말랑하게 해 주고, 또 어떤 문장은 나약해진 자신을 채찍질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결국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문장을 토해낸 수많은 명인들의 사유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문심조룡>은 중국 6조 시대의 문학평론 서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문 평 서라고 한다. 2천 년 전의 사람들도 문장이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이미 깨닫고 이를 대하는 태도를 만들어 놓았겠지. 좋은 문장을 보기 위에서는 문장을 대하는 태도과 식견을 단련해야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이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이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서, 체득할 수 있는 진귀한 문장들을 통해 자신을 다시 찾길 바라는 선아가 여기 있다. 






선아의 학창 시절의 꿈은 소설가였다. 글을 사랑했던 선아는 항상 책을 끼고 살았다. 하지만 글을 좋아하는 것과 글을 쓰는 재능은 별개의 문제였나 보다. 30대 초반이 된 선아는 늦깎이 신입사원으로 업무와 관련된 문장들과 씨름을 하고, 상사의 권위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말들과 동료, 후임들의 입에서 떠다니는 가십과 험담들이  매일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리고 30대 선아는 20대에 사랑하고 아끼던 낭만적인 문장들과 멀어지고, 오로지 일을 위한 문장을 읽고, 토해낸 것이다. 




선아가 또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선아는 초, 중, 고 심지어 대학교도 집이랑 가까워서 항상 등하교를 걸어서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집과 학교의 거리가 또 완전히 가까운 것은 아니어서 강의실까지 왕복 1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선아는 이 시간을 즐겼다.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선아의 뇌를 움직이는 태엽과 같았다. 세상에 대해 겪은 느낌과 감정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걷는 시간에 선아는 마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선아의 생산활동은 거기까지. 그 시간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집에 오면 거의 다 휘발해버리는 상황이 항상 아쉬운 선아는 한 자로 놓칠세라 머릿속에 생산한 그 문장들을 옮겨놓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외투를 벗고 손을 씻은 마음 바로 컴퓨터를 켜거나 노트를 펴서 휘갈기면 좋았겠지만, 선아의 끈기와 재능은 딱 거기까지. 그 문장들을 활자로 옮겨놓을 정도의 재능도 없었고, 재능이 없다면 글쓰기 훈련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부지런하지 않았고 인내하는 법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몽상가였다. 


 30대의 선아는 20대의 그녀가 그리 걷는 것을 좋아하는 몽상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30대의 선아는 먹고사는 일에 치였고, 30대의 선아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익혀야 할 세상의 문장들을 더듬더듬 읽고 이해하기에도 너무 벅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복병이 있었다. 스마트폰과 자신의 재산 중 하나인 자가용이 없었던 선아의 20대 시절에 비해 지금은 활자를 굳이 보지 않아도 볼 것과 즐길 것들이 주변에 차고 넘치게 된 것이다. 2021년을 살아가는 선아를 비롯하여 이 땅의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방금 전에 본인이 무엇을 본지도 되새기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에 눈은 홀리고, 그들의 뇌는 지쳐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 선아는 이제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 어린잎의 개기와, 초여름의 아카시아의 향, 한 여름의 매미소리, 가을의 붉고 낭만적인 낙엽 냄새, 그리고 빨갛게 얼어버린 두 귀와 볼을 감싸며 횡단보도 옆 붕어빵과 어묵을 사 먹는 소소한 낭만도 잊어버린 것 같다.




과거의 문장들은 비록 오래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무궁무진한 의미들을 체득하게 되면 나날이 새로운 것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아를 몽상가로 만들어주었던 깨우는 과거의 문장, 머릿속에서 팝콘처럼 톡톡 튀어나오거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새어 나오는 수증기처럼 지극히 평범한 문장들도 선아의 공장은 생산과 각인을 오랜 시간 멈춘 상태이다. 이 건망증 걸린 무료한 몽상가의 가끔씩 배를 뜨겁게 해 준 과거의 문장들, 혹은 걷기의 낭만을 다시금 회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날이 있었는데, 그 범인은 결국 '좋은 문장'들이 선아에게 우연히도 찾아왔을 때였다. 

선아는 얼마나 많은 시간 책과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아마도 현실의 늪에 스스로 몸을 던졌던 선아는 지난날의 꿈 많던 소녀에게 죄책감이 들었는지 의도적으로 책과 문장을 멀리해왔던 것 같다. 

 

그 잊고 있었던 걷기의 생각들이, 그녀가 탐하던 문장들이 가끔씩 희미하게 떠오르게 될 때면 선아는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선아는 자신의 침실에 작은 책상과 노트북, 그리고 스탠드 등을 갔다 놓았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문장이 아닌 지금, 여기의 문장들을 만나는 여정을 시작했다.





<별첨> 2019.5.20의 명문장으로 소개된 <문심조룡>의 다른 문장

https://blog.naver.com/minumworld/221536319031


중국 6조 시대(六朝時代)의 문학평론서. 499∼501년 추정(중국 6조 시대). 10권 50편(篇).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문(詩文) 평서로서, 양(梁) 나라의 유협(劉勰)이 제대(齊代) 말인 499∼501년에 저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前半) 25편에서는 문학의 근본 원리를 논술하고, 각 문체(文體)에 관한 문체론을 폈다. 후반(後半) 25편에서는 문장 작법과 창작론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전체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미문(美文)으로 씌었으며, 문학이란 내용이 충실해야 하고 그로부터 자연히 꽃피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당시 기교에만 치우친, 내용 없는 미문 위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같은 시대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과 함께 중국 문학론 연구에 중요한 원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심조룡 [文心雕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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