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인생일력' 데일리 명언 에세이 16 : 2021년 1월 16일
극락세계에 가기보다는 털 나고 뿔 달린 소가 되어
농사꾼의 농사일을 돕겠다.
-남전
이 글은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스토리가 언급이 되어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참고하여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최근 OCN에서 16부작으로 방영하는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주요 콘셉트는 카운터라는 악귀 사냥꾼들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 영혼을 잡아먹는 악귀들을 물리치고 악귀에게 희생당하고 사로잡힌 영혼들을 융으로 소환해주는 저승사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악귀에 주로 빙의된 인간들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악귀보다 더 지독한 악인이며, 4명의 주인공들은 이 악인들과 악귀들을 물리치고 선한 사람들을 구하는 권선징악이 뚜렷한 히어로물 드라마이다.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OCN 드라마 중 시청률이 10%를 돌파했다고 하는데, 넥플릭스 같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합치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인 것 같다.
오늘 문장을 읽고 이 드라마가 생각이 났던 이유는 '카운터'라는 캐릭터 설정과 드라마의 세계관이 이승과 저승, 사람과 영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카운터'는 코마 상태에 빠진, 즉 몸은 살아있으나 이미 영혼은 빠져나간 사람들 중 카운터의 조건을 갖춘 사람을 '융'에 있는 융인과 저승 파트너가 된다. (융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영혼을 접수하는 출입국 관리소)
우리는 눈으로 보거나,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음에도 이승과 저승이라는 가상의 설정, 저승사자와 악귀, 영혼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이 비현실적인 내용을 즐기게 된다. 이미 다양한 형태로 이러한 설정을 지속적으로 접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악귀를 물리치는 이 슈퍼히어로들은 평범한 국숫집을 운영하는 소시민들, 고등학생, 옆집 누나, 국숫집 사장님이라는 소위 보통의 사람들이 사실은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가 히어로가 되었다는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실제로 원작은 웹툰)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있을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 아니 그냥 터무니없어도 대리 만족하며, 감정이입이 될 수 있는 '평범함'에서 오는 대중적인 공감을 전제에 깔고 있다.
'극락세계에 가기보다는 털 나고 뿔 달린 소가 되어 농사꾼의 농사일을 돕겠다. '
이 문장을 드라마에 대입을 한다면 소는 '카운터'들이고 농사꾼은 '융인'이다. 드라마 전개 내내 카운터들은 현실에서 구르고 다치면서도 열심히 악인들과 싸우는데, 융에 있은 그들은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자주 대조가 된다. 자기 손으로 농사일을 하지 않은 농사꾼, 카운터들의 갑인 융인들은 카운터가 실제 위험에 빠질 때 비로소 상해를 입을 뿐, 농사일을 하는 소이자 을인 카운터들의 삶은 보통의 사람보다 5배 넘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언제나 위태롭고 위험하다. 올곧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졌기에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악귀 사냥꾼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카운터들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그냥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그들의 심성일 것이다. 때문에 악귀와 관련되지 않는 일들에 자주 개입을 하게 되고, 카운터 박탈이라는 융의 경고까지 받게 된다. 카운터 박탈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인데, 주인공들에게는 두 번째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운터들은 융인들의 꽉 막힌 원리원칙주의와 드라마상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들 사이에게 고민과 갈등을 빚게 되는 데, 결국 그들이 눈앞의 부당함을 눈감을 수밖에 없는, 즉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로서 '죽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더라도 죽음으로 가는 것보다 '삶'이 소중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으니까 삶이다.
이러한 설정 때문인지 나는 이 드라마가 시종일관 '삶'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흥미롭게 보게 되었다. 만화와 같은 흥미로운 설정과 권선징악이라는 꽉 닫힌 결말(아직 종영되지는 않았지만, 스토리 전개상 어설프게 열린 결말이 아닌 닫힌 결말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속에서도 '살고자'하는 욕망 '살아야겠다'라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융의 규칙에 맞춰나가면서도 단순히 악귀를 물리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는 스토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잊을만하면 뉴스에 안타까운 선택을 한 이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살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겪었을 고통에 마음 한 켠이 무거운 짐덩어리가 얹혀진 느낌이 든다. 그와 동시에 비열하게도 그들의 고통의 끝 속에서 내 삶을 다시 돌아보고있다. 타인의 고통 속에서 내 삶을.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삶이라는 것을 매번 강조하면서도, 극단적 선택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정말 살아있는 것이 저 극락세계로 가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영원한 안식보다 선과 악 사이에서 뒹구는 소의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