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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Feb 12. 2021

영원한 물방울

민음사 '인생일력' 데일리 명언 에세이 15 : 2021년 1월 15일

자신의 직위에서 묵묵하게 근신하며 일하고 
바르고 곧은 자들과 교제하라. 

-시경




 2021년 새해가 밝아오자마자 한국 미술계에서 큰 별이 진 소식이 들려왔다. 물방울 화가로 한국사의 한 획을 그었으며,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있었던 고 김창열 화백이 영면하신 것이다. 부고 소식이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화가로서의 존경심과 안타까움을 표한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한 길을 한평생 묵묵히 근신하며 걸어온 사람이 남긴 발자취의 찬란함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방울 화가로 기억되는 그 사람. 

김창열 [회기 SP 10001], 72.7 x 117 cm , 2006


 현대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치 실제 물방울이 종이 위에 맺힌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처음 미술을 빠져들게 된 계기 중 하나도 김창열 화백의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DSR이 아니더라도 핸드폰으로도 물방울을 접사 해서 찍을 수 있지만, 당시 일상에서 흔한 물방울이 캔버스 안 화면 여백 사이사이를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데, 마치 캔버스 위에 물방울이 맺힌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밑 작업이 되어있지 않은 거친 캔버스 천 위에 혹은 한자가 가득히 쓰여있는 천 위에 물방울이 맺힌듯한 착시현상, 그러나 가까이서 보았을 때 그것은 실제 물방울이 아닌, 붓끝으로 표현된 이미지인 것이다. 이 이미지는 단순히 물방울이라는 사물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6.25 전쟁의 끔찍한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즉 한국사의 상흔이자 눈물과 같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고통으로 잊혀간 개개인의 상처와 희생이 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겨있음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김창열미술관 전경 2019 (촬영 : 연두)

 

나는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주제를 브랜드화시켜서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대중성과 상업성은 획득할 수 있지만, 현대미술의 실험과 도전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는 치기 어리고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제주도 저지리 예술마을 내에 개관한 것을 알고 방문하여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조우하게 되었을 때, 그의 예술철학이 곳곳에 녹아있는 미술관 건축이 한몫을 해준 것인지 나의 시각이 또 한 번 바뀌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년시절에 받은 감정과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아마도 물방울 속에서 묵묵히 걸어온 그의 시간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김창열미술관 내외부 전경 2019 (촬영 : 연두)


 김창열미술관에 방문하면 그의 초기작부터 대표 회화작품과 그리고 설치와 조각으로 이어지는 그의 끝없는 실험과 사유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마르지 않은, 영원히 영롱하게 빛나는 그의 물방울처럼, 그의 묵묵히 걸어온 시대정신과 예술세계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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