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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달토끼 Nov 29. 2020

잠이 보약입니다.

염치 불구 이 내 잠아 검치 두덕 이 내 잠아

<졸고 있는 나와 아빠, 할머니>

 

 "학생, 일어나!"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KTX 열차 객실 안. 시계를 보니 서울역에 도착한 지 오래된 듯했다. 서울역이 종점인 게 다행이었지. 나를 깨운 사람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아, 지각하지 않으려면 그날도 뛰어야 했다. 아침시간에 허겁지겁 그렇게 뛰면서 대학교를 다녔다. 학교 근처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도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잠이 그렇게 쏟아졌다. 손잡이에 기대 턱을 괴고 졸다가 친구들에게 놀림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엄청 바보 같았겠지.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길어서 지루해서 그랬나? 아니면 이건 나만 그랬던 걸까?

 "삐이이익!"

 이번에는 집 앞 KTX역에서 짧게 정차한 후 KTX가 다시 출발하려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이다. 아, 또 대전행이구나. 하교할 때도 자주 졸아서 연고도 없는 대전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러 번이나 방문해야 했다. 그런 날이면 미안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승무원에게 가서

 "저 잠이 들어서 못 내렸어요."

 하면 안내를 해준다. 지금은 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면 승무원이 표 하나에 잔뜩 뭐를 적고 사인을 해준다. 그러면 나는 그 표를 가지고 대전역에 내려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무궁화호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 날은 대전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려고 대전까지 갔었나? 어떤 낯익은 승무원은 나를 보면 항상,

 "손님 오늘은 주무시지 마세요."

 하며 웃고 가기도 했다. 이렇게 잠 때문에 힘든 등하교 생활을 반복했다.


 그렇게 낮에 졸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밤에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 건 지금도 힘든 부분이다. 졸리고 피곤한데 잠이 잘 들지 않는 습관이 있다. 잠이 나를 괴롭히는 게 체력이 약해서 그러나하고 부모님이 한약도 많이 지어 주셨다. 그런데 아빠를 보면 유전인 것 같기도 하다. 엄마랑 내가 한참 티비를 보며 얘기를 하다 보면 '드르렁' 하고 코고는 소리가 날 때가 자주 있다. 아니,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 그 후에는 엄마가 항상 이불을 들고 잔소리를 시작하신다.

 "누워서 자요, 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야지."

 그러면 아빠는 꼭,

 "아니야, 나 안 잤어. 하던 얘기 계속해, 나 다 듣고 있어."

 하시는데 신기하게도 주무셨는지 정말 모르신다. 누워서 주무시면 좋겠는데 꼭 앉아서 말뚝잠을 주무신다. 심지어 아빠는 머리를 기대지 못하는 좌식의자에 앉으셔도 주무신다. 혹시 이건 엄마랑 나의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서 잠을 참으시다가 잠드시는 건가? 내가 잠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는 걸 알고 엄마가 해주신 말씀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도 잠이 많으셨는데 어느 정도 셨냐면, 마늘을 까다가 잠이 들어 툇마루에서 굴러 떨어질 뻔한 걸 엄마가 발견하고 깨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항상 걸레를 들고 계셨다. 할머니는 결벽증이 있으셨기 때문에 집을 깨끗이 하는 것을 중요시하셨다. 그런데 걸레질을 하다가 잠이 들어 바닥에 이마도 박으시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다 보니 온 집안을 닦으려면 하루 종일 걸리는 것이다. 치과의사들이 3,3,3법칙을 내세우며 캠페인을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그 법칙을 너무 잘 지키셨다. 하루 세 번, 밥 먹고 3분 이내, 3분 동안... 이 아니라 30분 동안이나.  칫솔을 물고 졸다가 치약이 바닥에 떨어져서 할아버지의 버럭 소리에 일어나 이어 닦곤 하셨다. 드라마를 참 좋아하시는데 졸며 보시다가 깨서

 "쟈가 뭐라고 했냐? 어떻게 됐어?"

라고 물으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둘째 고모도 잠이 많으셔서 이를 닦다가 잠이 들어 칫솔로 목을 찌를 뻔하셨다. 첫 째 큰아버지 역시 운전하시면 자주 졸으셔서 큰 엄마가 동승할 때만 운전하신다.

'역시 유전이었어!'


 요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잠'을 재밌게 읽고 있다. 평생 잠에게 시달리며 살아서 잠에 관한 관심이 지대한 것을 알고 남편이 사주었다. 소설을 읽으며 잠에 관한 의학적 지식들을 접하다 보니, 내가 자주 조는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소설 '잠'에도 실려있는 수면의 단계 과정이다.


0단계: 입면 과정

1단계: 아주 얕은 수면

2단계: 얕은 수면

3단계: 깊은 수면

4단계: 아주 깊은 수면

5단계: 역설수면(렘수면)


 소설 속의 엄마는 아들이 학교에서 자꾸 졸고 학업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잠으로 해결해 나가는 내용이 나온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해서 몸의 회복이 더디기 때문에 일어나서도 피곤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의 각 단계를 설명해주며 깊게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잠의 중요성을 아들에게도 일깨워주고 학교 성적도 점차 좋아진다. 이 부분에서 내가 왜 졸며, 왜 밤잠은 못 자고 잠의 질이 나쁜지 해답을 얻었다. 나는 수면의 입면과정이 힘들고 아주 깊은 수면 4단계에 잘 접근하지 못해서 몸이 회복을 못하고 낮에 집중력이 떨어져 졸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밤새며 공부하는 걸 최고로 여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문이다. 어쩌다 1등의 맛을 보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렸을 때 기초를 닦아놓지 않아서 요령이 없었다. 영어경시반에 들어갔을 때에도 공부의 양은 많고, 다른 친구에 비해 나는 너무 느렸다. 영어 선생님은 열의가 대단하셔서 우리들을 몰아붙이셨는데, 커다란 빨래방망이로 매일 겁을 주셨다. 영어로 된 드라마 대본을 통째로 외우지 못하면 빨래방망이가 가차 없이 내 허벅지를 가격하였다. 겁이 많아서 포기도 못했고, 결국 늘 밤에 깨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이 맞고 와서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 꾀를 내서 허벅지에 압박붕대를 돌돌 말고 간 적도 있었으나, 맞을 때 소리가 달라 걸리고 엉덩이로 옮겨 맞았다. 그 덕에 영어는 자신이 생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전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내 잠의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밤새며 공부하고 성적을 올리는 것이 중학교 때까지는 가능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버릇을 고치기에는 늦었고, 심지어 고3 때에는 수업시간에 졸기 시작했다. 문학시간에 너무 조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뒤에 나가서 수업을 들으라 하셨다. 서서 수업을 듣는데 그 채로 잠이 들어 뒤로 넘어졌다. '꽝'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모든 친구들이 뒤를 돌아보았고, 온 교실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잠은 깼지만 창피함에 어쩔 줄 몰랐었다. 선생님은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없냐며 서운해하셨었다. 재밌는 건, 그다음 수업내용이 민요 <잠노래> 였다는 사실. 잠노래를 배우던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었다. 이렇게 서서 졸다가 넘어지는 게 여러 번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지 요즘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요즘도 자주 졸아?"하고 묻는다.

  잠을 이기려는 나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점점 낮에 조는 정도가 심해졌다.  바퀴 달린 의자에도 졸까 봐 편히 못 앉았고, 항상 껌을 씹으며 공부를 했다. 손에는 얼음물이 담긴 컵을 쥐고 있었다. 안 그러면 언제 또 잠들고 아침이 될지 모르니까. 시험기간에는 너무 힘들어하니까 동생이 자기가 플루트 연주할 때 쓰던 악보 보면대도 갖다 줬다.

 "누나, 여기에 책 올려놓고 서서 해봐."

 그래서 서서 공부를 했는데도 결국 넘어졌다. 그렇게 점점 내 몸은 상태가 안 좋아졌고, 면역성이 약해져 감기에도 취약했다. 성적도 더 이상 오르지 않고 한계가 느껴졌다. 잠 문제만 없었으면 좀 더 공부를 잘했을 것 같다.


 요즘에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잠을 잘자는 것이 다음날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준다는 것을 느껴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1. 숙면에 좋다는 감태추출물 - 효과가 있는 듯했으나 낮까지 너무 졸려 한동안 먹었는데 포기했다.

2. 핸드폰을 보면 잠드는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자기 전에는 멀리하고, 밤에 자극적인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잠이 안 와서 피하는 규칙도 세웠다. - 아직도 철칙으로 세우고 지키고 있다.

3. 기사를 보다가 미 해군이 2분 안에 빨리 잠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어 따라 해보기도 했다. - 해군이 아니라 그런 절실함이 없는지 몸에 체득이 잘 안되었다. 그리고 6)-c. 단계는 부작용이 있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를 반복하다 보면, "생각하지 마"를 되뇌려는 의무감이 생겨 잠이 깬다.

미 해군이 2분 안에 잠드는 방법

1) 혀와 턱, 눈 주변 근육을 포함한 전체 얼굴 근육을 편안하게 이완하세요.
2) 양어깨를 늘어뜨리고 두 팔 모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만드세요.
3) 숨을 내쉬면서 가슴 힘을 빼고 편안하게 있으세요.
4)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전체 다리를 편안하게 이완하세요.
5)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상태로 유지하세요.
6) 그러고 나서 다음 중 하나의 상황을 마음속에 그려보세요.
  a. 여러분은 잔잔한 호수 위의 카누(작은 배)에 누워 있으며, 위에는 푸른 하늘만이 펼쳐져 있습니다.
  b. 여러분은 깜깜한 방안에 검고 부드러운 벨벳으로 만들어진 해먹에 누워 있습니다.
  c. 단순히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를 10초 동안 반복해 보세요.

4. 그래도 잠이 안 오면 신부님의 강론들을 듣기도 하고, 책을 소개해주는 강의를 너튜브로 듣기도 한다. - 가끔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잠이 오히려 깨는 부작용이 있다.

5. 타트체리주스 - 아직 실험 중인데 플라세보 효과인지 모르지만 이 덕분에 요즘 잠을 잘 잔다. 개인적으로 젤리형보다 주스형이 더 나에게 맞는 듯하다. 씹지 않고 마시면 되어 편리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잠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연구해야겠다. 어렸을 때 베르나르의 소설 '잠'이 쓰였다면 그걸 읽고 더 일찍 잠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잠을 깊게 자고 집중력도 높아져 서울대에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미련이 있다.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배운 민요 <잠노래> 중 한 구절 소개해보며 글을 마친다. 다른 의미로 쓰인 민요지만, 그때의 나의 상황을 정확히 표현했던 노래니 잊을 수가 없다. 오늘도 잠을 잘 잘 수 있기를...

<작자 미상_'잠노래'>

잠아 잠아 짙은 잠아 이 내 눈에 쌓인 잠아
염치 불구 이 내 잠아 검치 두덕 이 내 잠아
어제 간밤 오던 잠아 오늘 아침 다시 오네
잠아 잠아 무삼 잠고 가라 가라 멀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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