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세상 아래 모든 이방인들에게

by 사색가 연두

당신은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의 삶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밥만 먹고 인간은 왜 사는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철학자들이다. 아마 당신도 위와 비슷한 질문들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고민을 해 본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가끔씩 우린 모두 철학자가 되곤 한다. 음..., 그런데 과연 그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순 있는 걸까? 놀랍게도 철학자들 중에선 이 까다롭고 추상적이기만 한 문제에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들이 내놓은 답은 다 얼추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정말 허무하다. 너무 허무하다 못해 받아들이기 힘들기까지 하다.




'아무 의미 없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MjAyNTAxMjFfMSAg%2FMDAxNzM3Mzk1ODMwMzg3.mEpyaFV-rZiW36_Kak2JQWHaPIK4meKIx1oUXhAw2r8g.RXEojdChwILlT30N4nv7_eiIaSizWpZTT2LIokO-RcQg.JPEG%2Fgettyimages-3276157-612x612.jpg&type=sc960_832 알베르 카뮈 (1913.11.07 ~ 1960.01.04)


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을 아마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카뮈의 철학이 대중들에게 슬금슬금 퍼지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 그의 철학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그랬으리라 본다. 요즘이야 뭐 콘텐츠적으로 카뮈의 작품과 철학을 알기 쉽게 요약해 주는 영상이 많다 보니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 알베르 카뮈라는 인물은 절~대 다루기 쉬운 편이 아니다. 그의 저서는 꽤나 난도가 있는 편이며 난해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방인>이라는 소설은 정말 오해하기 쉬운 작품 중 하나다. 딱히 내용이 어렵거나 분량이 많은 작품은 아니다. 다만 그 소설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카뮈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꽤 까다롭다는 점에 있다. 그의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방인>을 먼저 접근하게 되면 "이게 도대체 뭐지..?" 싶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본인이 그랬다. (근데 아무것도 모른 채 접근하는 방법도 꽤 괜찮다. 모험이다.)


카뮈의 철학을 흔히 '실존주의'라 부른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세상을 인간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보라는 철학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기 위한 작품 시나리오를 아주 치밀하게 계획했는데 그 전개는 아래와 같다.


부조리: 이방인(1942) - 시지프 신화(1942)

반항: 페스트(1947) - 반항하는 인간(1951)

사랑: 계획 중 사망


이방인과 시지프신화는 쉽게 말하면 "세상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여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방인은 그중에서도 카뮈 철학의 '프롤로그'라 보면 된다. 그러니 이방인만 읽고선 절대 카뮈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페스트와 반항하는 인간은 그런 부조리함 속에서도 일종의 '긍정'을 바라본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그래, 알겠다. 근데 어쩌라고? 반항하며 살아라!"


그리고 마지막엔 카뮈가 생각하는 사랑과 그의 인간적인 면을 다룬 <최초의 인간>이라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부조리를 이야기했던 철학자가 가장 부조리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는 교통사고로 1960년에 사망했다. 개인적으로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이기에 그의 미완성 작품은 그저 아쉽기만 하다.


어찌 됐든 아쉬움은 잠시 뒤로하고, 나는 한국에서 카뮈의 철학이 다시금 떠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많은 가정을 세울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인'


이방인 속 주인공인 '뫼르소'는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뭐... 그래봐야 아무 의미 없으니까.'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덤덤하며 주변인들이 무슨 짓을 하던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방인 속 내용은 대부분이 뫼르소의 독백과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근데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책 속 대부분의 구절이 외부 환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자신의 원초적인 욕구에 대한 내용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피부가 어떻고..., 사물이 어떻고..., 잠이 온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마리를 보며 욕정을 느낀다거나... 하는 등의 식으로 말이다.


그런 뫼르소의 태도를 보며 사람들이 묻는다.


"저게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가?"


카뮈는 말한다.


"그렇다."


이상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그의 태도를 어떻게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 이유도 모른 채 사람을 향해 총으로 쏴 죽이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카뮈가 '이방인'에서 말한 부조리는 '죽음'을 키워드로 둔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래 살든 저래 살든 우린 모두 죽는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죽고 나면 무로 돌아갈 것이고, 그게 카뮈가 생각하는 생과 사의 이치다. 죽음 뒤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나(본인)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럼 살아있는 인간이란 어떤 생물일까?


'의미'에 목을 매는 생물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보다 왜 우리가 더 뛰어난 생물인지, 왜 우리 인간의 삶이 다른 지구상의 모든 생물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지를 납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온갖 사물에다 온갖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아가 종교가 되었고, 국가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개인의 삶도 똑같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위해 애를 쓴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전제를 두고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문제는 막상 자신이 죽어도, 우주적 관점에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와 내 주변은 잠시 슬피 울뿐 시간이 지나면 다들 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사회는 내가 죽은 시점이 언제가 되었든 상관없이 얄미울 정도로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다.


이 의미라는 것은 또한 여러 인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나의 철학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은 수십, 수백 가지의 길을 만든다. 나와 남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소설 속 뫼르소를 변호해 주는 어느 한 국선 변호사의 말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실이고 어느 것 하나 사실인 게 없습니다."



우린 자본주의 속 '화폐'와 같이 어떠한 공통적인 믿음을 가지며 살고 있기도 하다. 만약 이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면 화폐가치는 한순간에 나락을 향할 것이고, 그 시점부터 지폐는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음..., 근데 생각을 한 번 해 보자.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객관적인 이유라는 게 존재하나?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보편적 진리라기보단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 가깝다. 만약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조금 께름칙하게 느껴졌다면, 왜 뫼르소가 아랍인을 쏴 죽였을까에 대해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하다.


동시에 인간은 서로 다른 믿음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으로 역사를 써 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를 두고, 이념을 두고, 정말 여러 가지 이유를 두고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에겐 자신의 믿음이 곧 세상의 진리이며, 다른 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만 보이게 된다. 사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님에도. 이처럼, 우리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사실이고 어느 것 하나 사실인 게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불합리한 하늘 아래 모든 이방인들에게'


한국 자살률 13년만 최대... 하루 40명꼴


한국 자살률 OECD 평균 2배....


한국인 삶의 만족도 OECD 38개국 중 33위...


한국의 자살률과 출산율에 관련해선 아마 다들 지겹도록 들었을 테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통계를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없었다. '자연소멸'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키워드가 되었고, '도태'와 '실패'라는 수식어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곤 한다. 우린 걱정에 비해 타인의 삶을 지나치게 심판하려 들고 제멋대로 재단해 버린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는 거다.


우리의 인생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부조리하다. 내가 어떻게 살던 그 끝은 오직 죽음뿐이며, 태어난 것조차도 나에겐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다. 정말 어쩌다 보니 태어나 살고 있는 거다. 근데 사는 게 참 쉽지 않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애초에 모두가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누구는 유복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고, 누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출발선에서 한참 뒤떨어진 채로 생을 살아간다. 누구는 뛰어난 외모를 달고, 좋은 운동신경을 가지고, 타고난 머리를 통해 타인의 주목을 받는 반면에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는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은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삶은 그렇게 우리를 산에다 툭 던진다.


하지만 그 산에 '정상'은 없다.


우리는 결실을 맺으려, 성공을 손에 쥐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려고


산에 오르는 행위에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다 붙여대지만


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건


우리가 오르는 산에 정상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삶은 그런 우리를 보며 비웃는다.


"한 번 잘 올라가 봐~"


"근데 너 왜 그렇게 열심히 올라가? 그거 아무 의미 없어~."


어쩔 땐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냥 떨어져 죽는 게 어때? 너도 알잖아 이제. 사는 게 의미 없다는 거."


...


'어쩌라고?'



그럼에도 나는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살아갈 것이다.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었지, 진작엔 머릿속으론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어떻게 정상이 없는 부조리한 산을 오르며 여기까지 걸어왔는가? 대단하다.


그렇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엔 딱히 놓인 의미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반항하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 뫼르소는 죽음과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어두운 색이 있기에 밝은 색이 돋보일 수 있듯이, 우리 삶도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거다. 유한하기에 나와 내 주위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더욱 더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삶이 아무리 너는 아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이라 외쳐대도, 나는 '어쩌라고' 이 한 마디로 되받아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 우린 모두 그렇게 불합리한 하늘 아래에서 지금까지 걸어왔다.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그래봐야 의미 없다고 말하는 일들도 매일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그럴싸한 모양이 갖춰진 나를 볼 수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당신의 삶은 절대 그저 그런 삶이 될 수 없다. 절대 한심하고 보잘 것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우린 각자마다의 서사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서사의 주제는 절대 그 누구도 함부로 심판하고 재단할 수 없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죽음이 언젠가 우리를 찾아와 물을 것이다.



"후회 없이 걸어왔는가?"



삶은 이에 대한 대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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