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셀린저 - 호밀밭의 파수꾼
1950년대, 당시 미국은 그야말로 황금기 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높은 경제 성장률과 더불어 중산층들은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어른들의 사치스러운 향락과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는데, 그곳의 중심엔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 속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런 시기에 때마침 나타난 소설이 있다. 바로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셀린저는 다소 특이한 작가다. 미디어에 자신을 거의 노출시키지 않았으며, 평생 은둔 생활을 통해 베일에 싸인 삶을 고집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선 유일하게 표지가 없는 소설이 <호밀밭의 파수꾼>이기도 하다. 셀린저 본인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고 한다.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은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는데, 갑작스러운 호응과 관심은 그에게 부담이었다. 그는 점점 대중의 눈을 피해 살기 시작했고, 뉴햄프셔의 코니시라는 작은 마을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특히 기자들과 팬들의 접근을 철저히 거부하며 사생활을 지키는 것에 엄청나게 집착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작품을 집필했지만, 출간하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에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생전에 "출판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물론 그의 사생활 관련해선 논란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
이 소설은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한때 금서로 지정되거나 학교와 도서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속어가 많은 언어 표현, 콜필드의 반사회적 태도 그리고 성적인 내용과 종교적 비판등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내용들을 거칠게 표현한 책이라 아이들이 읽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콜필드의 행보를 보며 '과연 이 인물이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내 생각엔 순수함이란 단어의 정의를 좀 더 폭넓게 해석할 필요가 보인다. 그는 그저 어른의 세계를 경험하러 나름대로의 기행(?)을 일삼았던 것이고, 그런 행동들은 애초에 그와는 맞지 않았다는 점을 소설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홀든 콜필드라는 소년 자체를 순수한 청년으로 묘사하는 것은 소설이 던져주는 의미에 애초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동심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투쟁하는 불안정한 사춘기 소년의 방황을 통해 착함과 순수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맞아 보인다. 결국 홀든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환하게 웃었으니 말이다.
또한 몇몇 폭력적인 범죄와도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80년,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체포 당시 이 소설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 책이 나의 선언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 존 힝클리 주니어 역시 이 소설에 자신의 인생 책이라 집착하기도 했다.
현재에 들어, 이러한 논란은 오히려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와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지금은 검열보다는 청소년기의 불안과 성장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인정받으며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듯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기에 방황하는 인간의 내면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주인공인 콜필드의 이야기는 당시 서구권의 많은 청년들에게 공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대 이후, 60년대 후반엔 결국 히피 문화가 성행하기도 했고 ROCK 음악이 발전하게 된 시기이기도 한 만큼, 그때의 사회 분위기 이면엔 '반항심'이 깊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 당시 청년들은 무엇이 그토록 필요했던 걸까?
아니, 어쩌면 현재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도 해당되는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현대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사회 속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면,
당신은 '무언가'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괴로워하는 가?
순수함을 지키는 파수꾼
어른들의 세계는 왜 그토록 보잘것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정직한 규율 아래 그 선을 벗어나지 않는 학생은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지만, 툭하면 그 선을 벗어나길 반복하고 정해진 규칙을 제멋대로 바꾸는 학생은 문제아라 배웠다. 당연히 요구하는 대로 뭐든 맞춰주는 이들이 사회에선 너도나도 데리고 가고 싶은 인재임엔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싫어서라기 보단 내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그와 반하도록 행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나는 그 일정한 선에 맞춰 몸을 가누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이건 자기 자신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나라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기질적으로 타고난 반골기질이 있나 싶었다. 때문에 많이 방황했고, 또 혼자서 수없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규율을 무시한 채 사회부적응적인 모습만을 보이며 살아오진 않았다. 겉으로는 오히려 주변인들의 칭찬을 많이 받고 자라왔으니 말이다. 나름 학교나 학원에선 나를 좋아해 주시는 선생님들도 많이 계셨고, 학생기록부도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꽤 나쁘지 않더랬다. '조용한 성격에 수업에 성실히 임하며... 내면이 강한 아이... 체육 활동에 적극적이고 운동 신경이 좋은 편... 친구 관계가 완만하며... '
그런데 문제는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학교라는 기관 자체에 환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물었으며 교사들이 내려온 지시대로 따라야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아무리 잘 봤어도 그들이 내놓은 수행평가 점수가 좋지 못하면 성적은 확 내려갈 수 있었다. 난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유를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냥 따라!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네가 잘했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겼겠니?'
모든 교사들이 저렇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분명히 좋은 '선생님'도 계셨다. 아직까지도 내게 가끔 안부를 물어주시는 아주 고마운 분이 계신데, 그분은 학생 때부터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셨고 정말 아껴주셨었다. 하지만 대개는 저런 식이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두고 문제아로 취급하기 바빴다. 당연히 어느 정도의 규칙은 따라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자율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곤 교과서에 적힌 문자만을 그대로 주입하는 식의 교육이 과연 지속가능성이 있는 가에 대해선 이미 회의적인 입장이 대다수다.
사실 교육적인 이야기만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교육이 되게 중요하기에 얘기한 것일 뿐이다. 불안정한 청소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청년들이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일단 순수하고 착한 건 뭘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남들에게 불편한 지시를 내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인간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임엔 틀림없다. 실제로 이를 나타내는 여러 연구결과들이 나왔고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그게 쉽지 않다. 그럼 통상적으로 말해서 착한 것과 멍청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게 무섭다.
내가 보는 소설 속 홀든 콜필드라는 인물은 '소심한 반항'을 의미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총 3번의 경고를 받았지만, 결국 4번째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만다. 이젠 경고를 넘어서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걱정을 하게 된 그였다. 퇴학 사유는 그의 성적이 최소 합격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일탈을 감행한다.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홀든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그에게선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도 일종의 위선과 모순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타박하고 조금이라도 기준에서 벗어나면 '탈선'을 외치는 이들을 두고 환멸과 모멸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이 홀든이란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찌질하기도 하고, 사회성이 전혀 없으며, 자신만의 정리되지 않은 세계에 갇혀있는 미성숙함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서 이 소설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평을 한 사람들도 나는 꽤 보았다. 근데 내 생각은 당연히 청소년기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러한 시기를 거쳐가기도 한다. (사춘기를 딱히 겪지 않고 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는 들었는데 대단한 것 같다...)
어쨌든 본인의 상황과 사정을 나름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자신이 나름 존경과 호감을 표했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집에 찾아가 현재 자신의 상황과 방황하고 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홀든 또한 자신의 문제점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세상과 타협한답시고 개인을 억지로 사회 기준에 끼워 맞추라는 식의 교육이 어른들의 위선으로 보였고, 마음 깊숙한 곳엔 그들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을 더러 타락의 길로 빠져가고 있음을, 그리고 미성숙한 인간은 어찌 보면 사소한 것에도 쉽게 목숨을 건다는 조언을 건넨다. 이는 홀든의 고집과 신념이 사실은 되게 별 것 아닌 걸로 치부하며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 것이다. 홀든은 그의 조언도 달갑지 않았다. 결국 앤톨리니 선생과의 만남도 불편하게 끝을 맺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엔 또 다른 사정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홀든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조력자가 있다. 바로 여동생 '피비'다. 홀든에게서 피비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이다. 어른들과는 다르게 피비는 아이로써 그에게 희망과 순수함, 기쁨의 상징이다. 그리고 세상만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순수함을 잃어가는 홀든과는 대조적으로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며 되려 그에게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빠는 좋아하는 게 뭐야?"
"음...(한참을 고민하며) 뭐라고 했었지?"
"한 가지도 좋은 걸 생각해 낼 수 없는 거지?"
"그렇지 않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니까."
"그럼 어서 말해봐."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상상을 하곤 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일뿐 주변엔 어른이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랄까."
피비는 그가 지키고 싶은 순수함과 사랑이었던 거다. 그리고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일이 그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렇게 그는 피비를 데리고 공원에 놀러 가 회전목마를 태우곤 벤치에 앉아 바라본다. 피비의 웃는 얼굴을. 그리고 비가 막 쏟아지기 시작할 때, 그는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의 기쁨을 느낀다. 그런 것이다. 피비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보며 즐겁게 천진난만함을 바라보는 일.
나 또한 홀든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도 했고, 뭔가 울컥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실 소설 자체는 지루하다는 평이 많기도 하다. 실제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다만 나는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집중하며 보기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내게 던져준 메시지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도 어쩌면 놀이터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다. 착한 사람들이 커가면서 상처를 많이 받고 방황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사회를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많은 상처를 받아온 이들을 위한 책 한 권을 써내는 것이 내 목표이기도 하다. 또한 그런 사회가 무서워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길 택한 10대와 20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걸 딱 말하자면, 이건 그들을 위한 위로가 아니다. 정말 그런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건 굉장히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진실이다. 나는 그들에게 '진짜 현실'을 전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당신의 인생은 그저 그런 인생이 절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