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현충일의 그냥, 몰입했던 그 순간의 기록
비 오는 현충일, 한강 둔치에 돗자리 펴놓고 비타민D 합성하면서 책 읽으려 했던 계획이 무참히 젖어 흐려졌다.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와중 도무지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질 않자 마음도 덩달아 축축해진다.
오늘 하루를 축축하게 보내기엔 억울한 주중의 휴일이니, 꾸역꾸역 갈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은 탓일까 날씨도 이런 이상,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책도 마저 읽으며 침잠한 마음을 굳이 끌어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땐 인스타그램에 가고 싶은 곳들을 저장해둔 <가자!> 카테고리를 둘러본다.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일산의 라비브 북스라는 북카페가 오늘 마음의 주파수와 맞아떨어졌다. 왜 가고 싶은진 모르겠지만 이유가 따로 필요한가! 복작스런 서울에 있기도 싫으니, 가자.
30분쯤 차를 타고 달렸을까, 다 와갈 때 즈음 좁은 주택가 골목을 운전하다 좌회전을 하니 바로 라비브 북스가 나타났다. 없을 것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 순간은 조금 극적이었다. 적당히 인스타 감성이 섞인 우드톤 외관의 아기자기한 카페. 동네 사람들이 딱 좋아하겠다 싶었다. 사람 많지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들어가니 네다섯 남짓한 테이블이 있는 공간에 역시나 우리 자리가 없다. 그 사이 어쩌지- 하며 쓱 둘러본 공간은 생각보다 테이블과 진열대의 배치가 시원스럽다. 딱 책 읽기 좋을 만큼의 거슬리지 않는 음악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크고 긴 창문 덕에 훤히 보이는 창밖에는 소박한 동네 공원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라 운치까지 더해지자 찰나에 여러 감정이 오갔고, 그 찰나에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두리번거리자 '자리를 찾으시냐'라고 물어오는 여성 분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얼굴에 나도 모르게 공간에 이어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와락 열어버렸다. 낯을 어지간히 가리는지라 낯선 사람 앞에선 입만 웃는 난데, 편한 사람들 앞에서만 피는 눈웃음이 이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핀다. 신기하다. 공간이 이 곳을 담은 사람을 닮은 거였구나. 운이 좋게도 가장 앉고 싶었던 창가 자리에 금방 앉게 됐다.
커피를 주문하는데 응대해주시는 남성 분도 참 인상이 좋으시다. 우리 집에선 거리가 꽤 있는 곳이지만 "쿠폰을 드릴까요?"라는 물음에 동네 주민마냥 "네!"라고 대답하고 도장 두 개가 찍힌 쿠폰을 받아왔다.
북카페는 어떤 책들에 어떤 시선이 담겨 있을까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가판대를 찬찬히 살펴보며, 책이 많지 않은 서점에는 그만큼 한 권 한 권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여유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몇 걸음 걸어 나와 천천히 시선과 발을 옮기며 진열된 책을 여러 번 본다. 콕 집어둔 책만 사러 들어왔다 나가는 급한 발걸음이 없는 이곳.
<나무 수업>, <나를 부르는 숲>,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휴가> 같은 책들이 한 데 눈에 띈다. 나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 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주인공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담은 소설'이라고 쓰여있다. 요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삶의 깊이가 진하게 녹아든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져 단번에 끌렸다.
요즘은 주로 전자책을 들고 다니는 지라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라비브 북스의 큐레이터 제레미님의 <여름, 모험>이라는 제목 아래 전하는 말을 보았고, 마지막 한 문장에 마지못한 척 아주 마음에 드는 이유를 안고 책을 구매했다. '이 책들을 읽고 마음에 작은 신호라도 느껴진다면 주저하지 마시길.' 내 마음은 또 어떻게 아셨대. 문장 한 줄이 구매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구나, 며칠 전 들었던 카피라이터 이유미 님의 강연이 생각나면서. 그래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건 핑계지.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결제하러 갔더니 음료쿠폰에 도장을 하나 더 찍어주셨다. 처음 온 날 세 개의 도장을 찍으니 기분이 좋다. 생각보다 더 단기간에 꽉 찬 도장을 들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계산을 마쳤더니 이번엔 연필을 한 자루 건네주신다. 예쁜 까만 연필에 RAVIV BOOKS가 새겨져 있다. 밑줄 그으며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주옥같은 사은품이다. 그냥 펜도 아니고 연필. 주로 나는 펜을 사용하지만 좀 더 망설임 없이, 책의 질감을 온전히 느끼며 사각사각 그을 수 있는 연필이 37.84배쯤은 더 좋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었다.
내 책이 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받아들고, 오늘 아침의 울적한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 아이같이 신난 마음으로 돌아와 책의 첫 장을 읽었다.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라는 문장으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열어가는 첫 페이지에 마음이 벌써 편안하다. 순간 주책맞게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공간, 사람, 분위기, 커피, 문장, 비 오는 날씨까지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아귀가 맞는 순간 속에 있다는 건 놀라운 행운이자 행복임을 이제는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아는 걸 넘어 주체를 못 하는 것 같지만 허허. 감사가 넘치고 넘치는 순간, 이 순간도 행복도 문장도 라비브 북스도 오래 그곳에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조금이나마 생생하게 새겨보는, 그 순간을 위한 기록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