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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호 Feb 20. 2021

No More 입시..

교사로서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드디어 교직 경력 20년 중 3학년 담임의 열 번째 해를 마쳤다.

특히 지난 3년간은 1학년 때 신입생들로 맞이 한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고자 온전히 힘을 쏟아부었던 시간들이었다. 더군다나 나름 젊은 나이에 학년 부장을 맡게 되어 웃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그리고 새로운 선생님들과 새로운 학생들에게 더 나은 가치와 더불어 더 나은 진학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점철되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과들은 정량적 평가로 나온다.


서울대 몇 명, 인서울 몇 명, 카이스트, 포항공대 몇 명, 의치한 대학교 몇 명.....

이 결과들은 다시 인근의 학교들의 결과들과 비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들과 아쉬움, 그리고 환희와 기쁨....


누구의 감정들인가? 학생들인가? 학부모들인가?

아니다.

진학결과의 당사자들과는 거리가 먼 교사들과 관리자들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와 같은 3학년 부장과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감정들이다.

공부를 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학생들 본인일 텐데 왜 우리 교사들, 아니 관리자와 부장들이 더 민감하게 그 결과를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난 3년간의 시간들은 정녕 위와 같은 진학실적 숫자들로만 채워져야만 하는 것일까?

학생들의 적성과 흥미, 진로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호기심, 활동들을 통해 길러졌던 역량들은 안중에도 없는 요소들일까?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온다.

내가 1학년 부장으로 첫 교사생활을 했던 3년 전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말하며 강조했던 것은 위의 숫자에 들어 있지 않았던 가치들이었다.

상위권의 진학실적보다는 중간층의 학생들에게 더 신경 쓰며 그들의 진학실적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좀 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5-6등급 학생들도 원하는 학과에-대학은 힘들겠지만-학생부 종합전형으로 합격시키고자 하였다.) 흥미와 적성에 맞는 학과에 많이 보내며 활기찬 자기 주도적 수업 분위기와 학교생활을 만들겠다는 다짐들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이루어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졸업식날 보여주었던 졸업 영상 속에서는 그렇게 관심 많았던 학생들의 대학 진학실적은 없었다.


벚꽃 속에서 활짝 웃는 모습들과 땀 흘리며 40km를 걸었던 학교 행사, 친구들과 협동하고 경쟁했던 체육대회 속의 검게 그을린 얼굴들이었지, 그들의 대학 결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긴 3년간의 생활을 기껏 수능성적과 진학실적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우리의 학교생활 가치가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자기 고백 밖에 더 하겠는가?


남는 것이 결국 입시가 되어버리는 고등학교 생활은 우리 모두는 쓰레기 세상 속에서만 살았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영어단어 더 알고, 수학공식 더 알아서 문제를 하나라도 남들보다 더 풀 수 있는 능력, 감으로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찍어내는 능력만 3년을 배웠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찬란해야 할 십 대를 낭비하는 것이며, 교사 역시 그런 행동들을  방치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학교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졸업을 하게 되면 학생들은 자신들의 공부를 미화하며 그래도 재미있게 보내었다는 생각을 하고 교문을 나설 것이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의 실패로 인해 기다리는 것은 영문도 모를 사회의 불공평함과 험난한 세상이 주는 가혹함일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자녀들을 입시라는 알맹이 없는 전쟁터에 일치감치 보내고 있었던 것이며 교사 역시 동참했던 것이리라.


학교와 교사 역시 졸업과 동시에 진학실적은 리셋(reset)될 것이다. 그리고 맡기 싫어하는 3학년 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누군가에게 떠 맡기며 덕담이라며 잘하라고 할 것이다. 무엇을 잘할 것인가? 역시 입시 실적일 것이다.


이제는 제로섬 게임인 입시 실적의 굴레를 제거해야 한다. 왜 교사가 교사 스스로를 옥죄며 스트레스를 주고 힘들게 만들어야 하나? 왜 서로 비교하며 못난 교사가 되도록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측은지심을 느껴야만 하나? 올해 잘했다고 내년에도 과연 잘할 수 있나? 폭탄 돌려막기처럼 결국은 모두 자폭하는 교사 세계가 될 것임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나?

정량이 아닌 정성적인 것, 가치를 배우고 역량을 배우고 학생들이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사회의 첫 발을 자신 있게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아야 할 것이다.


일단, 대학 진학실적 통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계 속에 감춰진 왜곡된 데이터들을 벗어던지고 그 맥락과 속 뜻을 다시 봐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사는 [대학 중심]의 게임이 아닌 학생들의 학교생활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전공과 학과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올바른 진로진학의 경험을 겪게 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입시제도를 뜯어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대학 중심의 입시가 아닌, 입시를 둘러싼 사회와 가족의 어긋난 시선부터 새롭게 바꾸고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사는 가르친다.
교사는 이끈다.
교사는 배운다.
그동안의 입시 생활은 그 무엇도 아닌 가식과 허세, 허망, 좌절의 울타리였고,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굳건한 대문이었다.
이제 그 대문을 다시 걸어 잠글지 열지를 결정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입시라는 익숙함에 고개를 숙일 것인가, 어색함이라는 변화를 이끌 것인가.
올해는 작년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교사가 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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