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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호 May 11. 2021

엄친아가 판치는 세상

어쩌다 우리는 불행을 느끼게  되었는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불행하다는 감정에 휩싸이는 일이 많아졌다. 

불행이라는 것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그 종류와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여기서는 그 감정의 사회적 원인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얘기하고자 한다.


나는 불행의 원인에 상관없이 불쾌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종종 물어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불쾌하지? 왜 화가 나는 걸까?


그럴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며 찬찬히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심연의 끝에서 건져 올린 대답에 귀를 기울여보면 결국 그 감정은 내가 만들어 놓은 가치체계에서 보낸 몸과 마음의 신호일뿐이며 어떨 때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감정일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물론 이 정도의 객관적 성찰을 할 새도 없이 감정에 격하게 굴복하여 학생들에게 내 감정을 표현할 때도 더러 있다. 미안하다, 얘들아..)

무슨 말이냐고?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만들어 놓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실제로 우리 몸의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서 생긴다.) 호르몬에 의해 그냥 생기는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우리는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필요도 없다. 만약 그 원인을 찾아보고 대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불행하다는 감정의 원인은 주로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남과의 비교에서 제일 많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의 감정들은 사회 속에서 남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주로 발생한다. 불행 역시 결국 타인과의 삶 속에서 반응하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편의상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라고 하자) 기껏해야 부모님들이 그렇게 사랑하시는'엄친아' 정도가 나를 괴롭혔다. 또는 옆 동네 부동산 시세 및 사촌들의 재산 정도가 나의 배를 아프게 했다. 저녁 9시 뉴스에서 나오는 대통령이나 일부 정치인들도 내 마음에 분노와 슬픔을 일으키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들에 의해 수많은 엄친아가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옆동네, 사촌들이 아닌 전국의 땅 투기꾼들, 비트코인 및 주식으로 인해 돈을 벌게 된 사람들, 9시 뉴스가 아닌 24시간 시시각각 보도되는 별의별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의 부도덕적인 행동에 분노한다. 


즉, 예전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있어서 불행의 원인-비교대상-에 대한 접촉이 적을 수밖에 없었지(즉 불행의 씨앗이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은 인터넷  정보의 개방과 공유로 인해 너무 많은 비교 대상이 발생함으로써 불행지수는 치솟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처해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위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정말 뉴스에 나올만할 정도로 소수의 특이한 경우들이다. 상당수는 결국 다들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특이한 사례에 집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행을 느낀다. 이어서 나도 그 흐름에 동참하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에 쉽사리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내 그들 리그에 접근 조차 할 수 없음에 저주를 퍼부으며 비교 행동을 통한 불행지수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다.


요즘은 경제가 어려워지며 빠르게 부를 쌓고 있는 자들에 대한 소식으로 뉴스의 지면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결국 소수의 로또 당첨자들의 부러운 삶과 가상화폐 및 주식 투자의 성공으로 어린 나이에 퇴사를 결정한 극소수 파이어족들의 성공사례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앞뒤 재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에 뛰어들고 준비 없이 행동한 자신을 탓하면서도 자기만 돈을 못 벌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또한 00 학원 수강, 00 공부법 실천, 00 초등학교 및 중학교 및 고등학교 입학을 통해 로열로드(Royal Road)의 길을 걷는 소수의 공부 잘하는 엄친아들의 모습들을 보며 나도 그들의 생활방식을 따라 한다면 그들처럼 할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이 사례 역시 철학적, 교육적 고민 없이 대세에 동참하면 본인 역시 그들처럼 금방 학업적 지위 상승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비교 행태에서 나온 행동들이다. 


학교 및 입시 상황을 추가적으로 살펴보자.

A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는 학부모님들의 심정은 다음과 같다. 

'그 학교는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 대학 입학률이 좋더라. 그러니 우리 아이도 입학하게 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입학하면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갈 뿐 본인은 결국 착각 속에 있었음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생기는 인지부조화에 의해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남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음에도 좋은 대학에 못 간 것은 결국 학교 탓이라고 떠들어 대면서 불행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여기서도 불행의 원인은 대학 입학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남들과의 비교 행위이다. (이 반복적인 사고 구조 속에서는 서울대 의대가 아니면 국민 누구나 불행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는 특정 언론에서는 서울대 입학생 및 등록자 배출 고등학교를 전국단위로 조사하여 해마다 발표하며 각 학교의 교장들과 3학년 부장들을 애달프게 만들고 속 쓰리게 만든다. 옆 학교는 몇 명인데, 우리 학교는 왜 이것밖에 안되는가라는 질책과 자책, 힐난과 비판으로 서로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옆 학교 교장 앞에서, 학부모들 앞에서, 그리고 동료 선생님들 앞에서 무조건 남들보다(그 남의 기준이 누구인지 위의 언급된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랑스러워할만한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모호한 기준이 그들의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음을 왜 모를까. 그리고 그 씨앗은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타인과의 공동체 속에서 필요한 건 비교가 아닌 성찰이다.


정보화 시대로 인해 넘쳐나는 정보와 그런 정보들의 신속한 공개, 그리고 나의 삶과 비교하는 우리들의 행태가 불안이라는 감정을 우리 마음에서 더욱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 페이스북의 화려한 남들의 삶은 결국 소수들이며, 그 사진들 조차 그들 인생의 수만 가지 모습 중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the Best)만 게시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불행이 우리가 남들과 비교하는 행위에 의해 발생한 감정이라면 그 반대의 행동을 통해 행복도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비교가 아닌 자신 들여다보기 행동을 통해 불행의 반대인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남과의 비교를 통해 불행의 씨앗을 키우기 전에 다시 말해 타인들의 삶을 보기 전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성찰 및 반성을 뜻하는 reflection이라는 단어는 원래 '반영' 및 '반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되돌아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게 비교랑 다를 바가 뭐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만을 바라보며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는 행위가 비교라면, 타인을 바라보되 나의 삶, 나의 생활과 생각 및 기준을 중심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성찰이다. 타인의 삶이 아닌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는 결코 그들과 다르며 처해 있는 상황과 조건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과정과 나의 과정 및 경험이 다르기에 결말 역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는 나만이 original and unique 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비교불가의 자율적, 독립적 삶의 시작을 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치킨집 하나가 잘 되었다고 너도나도 그 기준으로 그 사람의 과정을 답습하여 치킨집을 나도 차리게 된다면 매출 비교를 통해 나의 처신을 비난하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땐 그 치킨집주인의 행동을 거울삼아 나의 환경과 조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후 다른 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비교 지옥에 빠지지 않고 나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슬랭 덩크라는 일본 만화에서 강백호는 전국 대회를 앞두고 여름방학 동안 점프 슛 2만 번을 연습한다. 하지만 첫 시합에서 굴욕을 당하고 벤치에 앉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라이벌인 '서태웅'이 아름다운 슛폼으로 연거푸 슛을 성공시키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 옆에 있던 '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태웅 군의 플레이를 보고 훔칠 수 있는 것은 전부 훔쳐야 해. 그리고 태웅 군보다 3배는 더 연습할 것, 그렇지 않으면 고교시절 동안 절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어요.'


난 이 대목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무조건 서태웅의 기준으로 그를 바라보면 강백호는 한 없이 작아 보이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실력 차이에 따른 비교 지옥 속에서 불행함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태웅과 강백호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그 환경적 차이를 인정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서태웅은 또한 전문 슛터이고 강백호는 슛보다는 리바운드에 강한 타입이기에 그에 따른 능력을 특화시켜야지 무조건 따라가서는 자신의 강점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즉, 서태웅이라는 비교대상의 프레임에서 빠져나와 나만의 장점을 강화시켜나간다면 굳이 비교당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는 '북산'이라는 강하고 조화스러운 공동체(팀)를 만들어 낸다.


무조건 남들보다 하나 더를 외치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성찰하고 가치관을 성장시키고 나아가 나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실천하는 삶..
타인들과의 공동체 안에서 비교와 경쟁이 아닌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공유하며 나를 성찰할 때 나 다운 무엇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은 쉽다. 현실은 이렇게 간단하진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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