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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영호 Dec 31. 2020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인간의 가능성

2021 대학 입학 결과를 되돌아보며

1. 양자역학

올해 3년 만에 3학년을 다시 맡으면서(재작년부터 순차적으로 데리고 올라온 학생들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과학중점반을 담임으로 신청하는 도전을 해보았다. 수학을 싫어해 영어과에 온 입장에서 그리고 지난 9년간의 3학년 담임을 오롯이 인문반 입시만 담당해온 입장에서 과학중점반(소위 자연반) 입시는 내 입시 인생의 최대 도전이자 종점을 찍을 것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학이 늦어진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독서과제를 주고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피드백을 해주고자 이메일을 연 순간 우리 반 1번의 독서-책 제목도 기억 안 난다- 보고서 주제가 '양자컴퓨터'였다. 이어서 다른 학생들 중에는 '맥스웰 방정식 탐구', '깁스 자유에너지 탐구' 등의 어려운 낱말들로 가득 채운 보고서를 보며 아연실색했다.

문과 위주로 (작년에는 경제반을 맡아 주로 경제 책을 많이 읽었었다.) 가르쳐 온 내가 이런 보고서를 대상으로 감히 제대로 된 피드백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심각한 자괴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과학도서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지대넓얕) 시리즈'에서 과학 속 철학사상들을 살펴보았고 ' 문명과 수학', '넘버스', '빛의 물리학' 등의 EBS 교양 시리즈를 읽으며 과학의 발전에 대해 대강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1, 2권'을 읽으며 과학탐구에서 힘을 빼기로 결심하였고  '세상 물정의 물리학', '김상욱의 과학공부', '떨림과 울림', '김상욱의 양자역학',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를 읽으며 양자역학 세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실험으로 양자역학을 촉발시킨 당사자인 '슈뢰딩거'조차 양자역학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아인슈타인' 역시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이 이론을 학생들이 읽고 탐구한다고? 그럼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힘들어도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세부적인 공식들이나 이론들 앞에서 문과생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영화나 만화에서만 나왔던 시간 탐험, 양자 세계, 양자 폭탄 및 전자총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수업시간에 양자역학을 가지고 농담하고 있는 나 자신과 학생들의 놀라움이 섞인 반응들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양자역학의 세계를 탐험...... 할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 책을 읽으며 느낀 인문학적 관점을 같이 나눠보고자 한다.


2. 빛의 이중 슬릿 통과 실험

양자역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으로 전자나 빛이 2개의 구멍을 통과한 후 스크린에 나타나는 모습을 관측하는 실험이다. 대상이 입자일 때는 즉 실험자가 관측을 할 때는 슬릿 중 한 군데로만 빛이 통과한 흔적을 뒤의 스크린에 남기지만 관찰하지 않을 때는 양쪽 슬릿(구멍) 모두를 통과한 빛의 흔적을 스크린에 남긴다. 즉, 빛이라는 대상이 입자(관측할 때)냐 파동(관측하지 않을 때)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남겨 과학자들에게 심오한 과제를 남겨준 것으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 양자역학에 대한 격렬한 토론들이 생겨난다.

(자세한 것은 전공자에게 물어보자.)


중요한 것은

실험자에 의해 관찰할 때 빛은 입자로서 어느 한 지점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만 관찰하지 않을 때에는 슬릿 A와 B 모두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개(여기서는 2개)의 가능성을 지닌 것을 양자역학에서는 '중첩 상태'라고 한다. 즉, 측정은 거시 세계의 장치가 수행하고 측정을 하면 미시 세계의 중첩 상태가 깨지며 거시 세계의 한 상태로 귀결된다. 이를 과학자들끼리 모여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나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



3. 관찰(측정)의 환경에서 벗어나기

양자역학 관련 책을 읽으며 계속 반복되는 말 중의 하나는 '측정'과 '중첩'이었다. 그렇다면 측정의 주체자는 누구인가? 과학자들? 공기? 빛?

쉽게 얘기하면 피 관측자의 여집합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시 말해, 관측당하는 대상자를 둘러싼 환경인 것이다.

환경을 떼어놓고 보면 그 물제(빛)는 양자역학의 법칙에 지배를 받아 파동으로서 A와 B 구멍을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보여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원자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 역시 빛처럼 양쪽 모두를 동시에 통과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다.


인간은 환경(측정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도 관찰당하는 순간 A와 B 슬릿 모두를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 대신 어느 하나 만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원래는 빛나던 존재였다.

입자도 되고 파동도 되며, 서로 극단의 장소(A, B 슬릿)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였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꾸준한 시선과 돌봄 속에서 관측당해왔다.

그들의 관찰에 의해 그리고 환경의 압박에 의해 우리는 가능성을 제거 당한채 하나의 목표(A 슬릿)를 향해서만 달려 나간다.

의사, 판검사, 변호사, 고위 공무원, 대기업 회사원 등 부모님들이 정해주는 직업만을 가능성이라고 생각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학교 시험이라는 측정을 당하며 그나마 있던 B슬릿을 향해 꿈꿔왔던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부모나 교사의 관찰(측정)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도 빛처럼 어느 구멍이라도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처럼 살아있을 수도, 죽어있을 수도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과 우주의 한쪽 끝이 다른 한쪽 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 속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며, 퀀텀 비트(큐비트)를 활용한 양자컴퓨터처럼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신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특히 진로진학을 담당하며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상대하다 보면 이러한 현상을 자주 경험한다. 자녀의 대학입시조차 주변 엄마 친구들, 친척들의 시선이라는 눈치를 살피는 경험을 말이다. (물론 나 조차도 쉽지 않을 듯하다.)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 학생의 꿈은 A인데 자꾸 엄마와 아빠는 B로 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학인 경우는 실력 여하에 상관없이 무조건 '인 서울' 또는 '수도권'을 고집하다가 학생의 전공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미래의 가능성 조차 접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올해 입시 역시 그러한 점들이 두드러진 경우들이 많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들, 그리고 교장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의 입시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아이들의 적성과 호기심, 가능성을 믿어보고 지켜봐 달라고...

그리고 선생님들의 교육철학을 신뢰해달라고...

그런데 과학에서 관찰이 없으면 그게 과학이냐고 물었던 아인슈타인처럼 우리도 결국 타인의 시선과 관찰에서 절대 독립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 교사들과 아이들은 그들의 관찰과 관측에 영향을 받게 되어 그 순수한 잠재력은 꽃피우지 조차 못하고 시들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의치한 SKY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이라는 익숙한 패턴 속에 정형화되어버린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도 같이 묻힌다.

지금 현재도 서울대 몇 명 배출이라는 신문의 기사로 학교와 교사, 학생들을 평가하고 있다. 50년 전에도 그랬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나조차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당 학생들의 꿈과 역량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향상되었는지 판단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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