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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환 Jul 07. 2016

그깟 168만원 3부

168만원으로 누려보는 신세계 - 미끼에 낚이지 않는 자유로움

  2016년 7월 5일 현재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교원들은 교육지원청으로부터 성과상여금을 받았을 것이다. 

  앞서 '성과금을 마음대로 할 권리, 그깟 168만원 1,2부'를 통해서 성과급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제목 그대로 그깟 168만원의 돈 앞에 소중한 가치들을 저버려선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에도 성과급과 관련된 아름답지 못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과급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교사 개개인이 도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현실성 떨어지는 얘기라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그럼 시작해보겠다.


교육의 질 개선과 교원의 사기진작 도모??

2016 교사 성과상여금 지급 계획 목적:
1. 교직사회의 협력과 경쟁 유도를 통해 교육의 질을 개선함과 동시에 교원의 사기진작 도모
2. 수업과 생활교육을 잘하는 교원을 우대하여 교원의 교육전념 여건 조성

  다시 한 번 교사 성과상여금 지급 계획 목적을 가져와봤다. 


"교직사회의 협력과 경쟁 유도를 통해 교육의 질을 개선함과 동시에 교원의 사기진작 도모"


  정말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다. 한정된 돈을 걸어놓고 상대평가로 등급을 정하는데 협력? 무슨 현실성 존나게 떨어지는 헛소리지? 당장 옆반에 있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교사가 나의 성과급을 앗아가는 경쟁자인데 무슨 X발 협력을 한다는 건가? 다 같이 협력을 하여 교육의 질을 개선시키려면 모두가 일정 등급 이상 성취할 수 있도록 절대평가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절대평가로 시행하려면 성과급으로 지급해야 할 돈이 예상보다 초과할 수 있으니, 한정된 돈을 걸어놓을게 아니라 성취해내는 만큼 성과금을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자본주의 기본원리는 알기는 아나? 공무원 총급여는 이미 한 해 예산으로 다 정해져 있는 한정된 자원 같은 개소리는 하지 마라. 한정된 자원 혹은 총급여가 정해져 있다면 성과급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는 걸 성과급을 담당하는 재정 관련 부서에서 이마 다 파악하고 있었고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한정된 돈을 가지고 서로 돈을 더 받아가 보라고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협력이 생긴다는 건지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작년에는 학교 간 성과급을 따로 두어서 서로 직대면할 일이 거의 없는 지역 내의 교사들을 학교라는 편으로 나누어 경쟁시킬 때는 좀 덜 잔인했다고 칭찬해야 하나? 그래서

'가'학교는 등급 S, '나'학교는 등급 B. '가'학교에서는 올해 S를 받았으니 내년에도 열심히 해서 꼭 S를 받자. '나'학교는 올해 B였지만 내년엔 좀 더 열심히 해서 꼭 S를 받도록 노력해보자!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집단 내에 협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학교 간 경쟁이 유도된다고 생각했었나? 개인이든 학교라는 집단이든 최하등급 B를 받으면 

'그래, 이번에 난 B등급이었으니 뭔가 모자라는 게 많았을 거야. 그러니 앞으론 더욱더 열심히 해서 S를 받아야지!'

라는 생각이 정말로 생기긴 하나? 어떤 모지리 같은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직접 만나봤으면 좋겠다. 솔직한 말로 기분만 더러운 게 사실 아닌가?


  올해는 학교 간 성과급이 완전히 없어지고 개인성과급 100%로 지급되는데 이것에 대한 후유증은 생각해봤나? 좀 전에 "학교 간 성과급이 덜 잔인한가?"라고 물었던 이유가 있다. 전쟁사를 통해 의미를 찾아보겠다. 

  인류사를 논할 때 전쟁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막론하고 빠질 수가 없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고대 전쟁 그러니까 원거리 무기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전쟁을 겪은 병사들은 원거리 무리가 발달한 시대의 병사들보다 정신이상이나 정신병적 후유증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참고로 최근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 중 스나이퍼 출신들도 정신이상이나 정신병적 후유증을 많이 겪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병사들이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같은 형상을 갖추고 있는 인간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피 튀기고 살이 찢겨나가는 혹은 그보다 더욱더 잔인한 장면들을 직접 목격하기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대전은 적을 직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한 버튼 조작으로 적을 살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후유증도 덜할뿐더러 죄책감도 별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학교 간 성과급이 있었던 작년까지는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속한 학교 이외의 다른 학교의 등급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다른 학교 교사들이 낮은 등급을 받고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아니, 그냥 B등급이 당연한 것이지 하며 체념했을지도 모른다)을 직접 대면하지 않으니 당연히 관심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상황을 보라. 학교 간 성과급은 사라지고 개인성과급 100%로 지급한다. 내가 속한 학교 구성원 사이에서 30:40:30의 비율로 S, A, B가 나뉜다. 게다가 개인성과급 100%이기에 작년보다 등급별 지급금액이 더욱더 벌어져버렸다. 여기에다 차등지급률 100%를 적용했다면 그깟 168만원이 아니라 무려 240만원이라고 느낄 것이다. 


'내가 왜 이 등급을 받아야 하지?'
'내가 적게 일한 것도 아닌데 왜 저 사람보다 적게 받아야 하지?'
'연공서열로 주지 말라고 해놓고 선배교사라고 더 받아가네?'
'요즘 젊은것들은 선배교사들에 대한 예의가 없어. 내가 젊었을 땐 선배들한테 양보했단 말이야.'
'분명 학교에 헌신한 건 나인데 왜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은 등급이지? 혹시 관리자들과 뒷거래를?'

성과급을 균등 분배하지 않는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위와 같은 종류의 생각들 정말로 안 하시나요?


  개인성과급 100%, 이건 학교 안 교사들끼리 백병전이다. 개싸움이라는 얘기다. 개싸움에선 어느 한쪽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끝나는 경우가 있을 리 없다. 서로서로 위와 같은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놓고 싸워도 문제고, 겉으로는 "자기 실적에 따라 가져가는 게 합당하죠. 전 괜찮습니다"라며 위안 삼아 혹은 태연한 척 말해도, 속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면 협력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교사들 간의 불신이나 분열이 더욱더 가중될 것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적과 동지'라는 개념을 말했다. 나와 뜻이 같거나 처지가 비슷하면 '동지',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적'이라는 뜻이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나 정말 다양한 이유와 기준으로 대면하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적'과 '동지'로 구별 짓고 '동지'로 분류된 무리에 속하려고 한다(물론 드물지만 예외는 있다). 문제는 적과 동지로 나뉘는 순간 그들 사이에 정치적인 대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 상황을 보라. 성과급이 저렇게 나뉘었다면 같은 등급끼리 모종의 연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S등급은 S등급끼리 모여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고, A등급은 A등급끼리 모여 중간은 갔으니 이걸로 되었다 위로하고, B등급은 B등급끼리 모여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거나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분개하지만 속으로 삭히고... 

  이렇게 성과급 정책에 따라 상대평가를 거쳐 S, A, B가 자신의 몫을 군말 없이 챙겨가면  정말로 교육의 질이 개선될까? A나 B 등급을 받은 교사들의 마음을 그깟 돈으로 말 못 할 상처를 만들어 놓으면, 이들이 가진 아픔은 수업시간에 들어서면 어딘가 뾰로롱 다 날아가버리고 수업에 전력투구하며 교육의 질을 개선하려고 노력을 할까? 이딴 식으로 편 가르기를 해놓으면 교육의 질 개선뿐만 아니라 교원들의 사기진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 뭐 X친 사이코패스 같은 짓거리냐? 정책을 추진할 때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생각이나 하는가? 


"저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표현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교사가 X발, X친, X같네라는 말을 쓰면 너무 품격도 없고 그렇잖아요."
"네, 그럼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끝."


혹시나 글이 너무 격정적으로 쓰여서 읽기 힘든 분들은 여기까지가 끝인가 봅니다. 안녕히 가세요. 행복하길 바라요!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168만원으로 누려보는 신세계


  이제 성과급도 급여통장으로 들어왔고, 성과급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없이 '내가 정한 게 아니라 나라에서 시행하는 건데 내가 뭘 바꾸겠어. 난 나에게 주어진 일을 했고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해.'하며 균등 분배하지 않는 학교에 계신 교사분들께 참고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이가 젊다고, 경력이 얼마 안 되었다고, 이번엔 네가 그냥 받아들여라 등등하고 많은 같잖지도 않은 이유로 B등급을 받은 선생님들께 행동강령 비슷한 것들을 알려드리겠다. 단,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응용하길 바란다.


1.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자.

 

 처음부터 당연한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니까 잊어버리고 아니면 개무시하는 것 같아서 꺼내봤다. 실제로 학교든 어디서든 일을 해보면 공적인 상황에서 사적인 것을 은근히 들이밀면서 압박을 가하고, 사적인 상황에서 공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말려들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니?'에 빠져든다.

  교사는 스승이니 뭐니 하는 말들이 많은데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하자. 우리는 직업으로 교사를 선택했고 돈을 벌기 위해 학교로 오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말은 일하러 온 것이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지금 글 쓰고 있는 당신은 학교에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온단 말인가요? 그게 교사로서 할 소린가요?"
"...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신가요? 중간에 말 자르지 말고 일단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죠."


  돈을 번다는 말에 방점을 찍고 자본주의적 속물근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착각이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한 인간(교사)의 인생과 삶이 다수의 인간(학생들)들에게 정면으로 부딪혀 나가는 엄청난 일이다. 이것 말고도 교직을 묘사하는 수많은 상황과 표현들이 있지만 생략하고, 이 엄청난 일들을 해나가기에 우리는 돈을 정당하게 받는 것이다. 삶과 삶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이 과정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위와 같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식의 공사 구분 못하는 것들의 훼방이 들어온다는 건 엄청난 방해 요소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배움을 얻는 일을 제대로 하고 싶은가? 그럼 공사 구분부터 확실히 하자.



2. 업무를 처리하기 전 성과급 등급에 대해 협상하자.


 " 이 업무를 하면 성과급 S를 줄 건가요?"
 "허허, 이 사람아.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실례야."
 "왜죠? 업무 곤란도는 성과급 지표에 들어가잖아요."
 "그래도, 이 사람아. 어떻게 일을 할 때 그런 것들을 다 따져보나? 그렇게 하면 사회생활 못해."
 "열심히 일하고 뒤통수 맞으면 그게 기분 나빠서 제가 더욱더 사회생활을 못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수업과 관련된 일들을 잘하는 건데 전 그것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참으로 도발적인 질문과 대답들이다. 어떻게 저렇게 대답하냐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나보다 연장자이거나,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혹은 부장교사들, 선배교사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한 대응은 밑에 글에서 언급하겠다.

  성과급 등급을 협상하는 건 위에도 적었듯이 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바로 교육을 위해서다. 교사라면 누구나 교재 연구 혹은 수업 준비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고경력 교사가 되면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깨달은 바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현재 필자의 경력은 11년 차인데 날이 가면 갈수록 공부할 거리가 많아지고 있다. 같은 학년, 같은 과목, 같은 내용을 보아도 년수를 더해갈수록 그와 관련된 것들이 생각그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더욱 깊이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또 해가 지날수록 교육학 책들에서 X나게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이론들이 감탄을 자아내는 것들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들이 필요한데 업무 따위에 시간을 내준다는 건 교사의 진짜 업무인 수업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것과 같다. S등급을 주지 않겠다면 업무는 무시하자.



3. 우리는 이미 어른이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동등한 어른이다.


  학교에서 한국사회까지 확장하자. 우리가 주로 듣고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어른 말을 들어야지."

라는 거다. 학교에서 '어른'하니까 지금 여러분 머릿속에 교감, 교장이 떠오르는가? 이건 거의 세뇌 수준인가 보다. 나도 이 말이 어떤 용례로 쓰이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어른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 학교의 어른은 교장선생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삼단논법을 이딴 거에 쓰라고 배웠나? 뭔 소리들 하고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어른 아닌가요? 우리는 만 19세를 넘어서는 순간 이미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공인된 어른이 되어있었고,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나온 상태다. 일단 이것만 기억하자. 우리는 다 동등한 어른이다.

 그런데 다 똑같은 어른인데 여기서 뭔 별개의 어른이 등장한단 말인가? 나이가 많으면 더 어른 아니냐고?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 것 같은가? 아니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어른이 될 것 같은가? 직위가 높아지면 더 어른이 될 것이라고 믿는가? 그런데 어쩌지? 실제로 자신보다 연장자이거나 직위가 높아도 유치하다 못해 수준 낮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동안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아오지 않았는가? 

  수준 낮고 유치하면 무시하고, 수준 높고 성숙한 사람은 존중하자는 말이 아니다. 어른은 나이만 먹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성취했을 때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한 말,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비로소 되는 것이다. 좀 더 설명을 덧붙여보면, 우리는 언제나 어른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불교에서 "중생도 깨달음을 얻으면 그 순간 부처가 되고, 부처도 미혹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그 순간 중생이 되고 만다."라는 말이 있다. 어른은 어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늘 현재 진행형이다. 


"아니, 말투가 거친 것은 글쓴이의 문체라고 하죠. 하지만 한국 사회 전통윤리 질서까지 부정하시는 건가요?"
"아직도, 제 글 보고 계셨어요? 안 나가세요?"
"......."
"그럼 안 나가실 거면 끝까지 보고 가세요."



4. 누리자, 이 자유를 학생들과의 수업에!


  아마 이쯤 되면 학교 안에서 온갖 비난과 욕이란 욕은 독차지 혹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헬게이트가 닫히고 가능성으로 풍부한 세계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성과급 B를 받겠다고 선언하자. 나는 성과급 최저등급을 받아도 상관없으니 교육과정 운영과 상관없는 일체의 행정적인 일 따윈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이제껏 나를 괴롭혀 온 수많은 잡무는 안녕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라. 

대한민국 어느 초등학교의 '2016 성과상여금 지급 등급판정 기준'

  학교마다 성과상여금 등급판정 기준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지만 큰 맥락은 비슷할 것이다. 몇 개만 골라서 어떠한 가능성이 그 안에 숨어있는지 살펴보자.


 ①수업지도 - 수업공개 횟수: 공개수업을 꺼려하고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장학 및 컨설팅, 수업연구, 교과연구회 등의 잡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페이퍼워크로 처리되는 일 따윈 X무시할 수 있고,  반작용으로 수업연구에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②생활지도 - 독서지도: 학생 1인당 평균 대출권수 따위로 점수를 매기고 있다. DLS 숫자 통계만 채우려고 무의미하게 찍어대는 대출 숫자가 중요한가? 적은 수의 책을 읽더라도 깊고 풍부하게 사유하는 게 더 중요한가? 


③담당업무 - 학생지도표창: 학생이 넘치는 재능과 끼를 주체 못 하고 있으면 그들에게 각종 대회를 안내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자.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각종 대회에 참여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학교의 실적 혹은 교육지원청의 행사에 머릿수 채워 넣기 등등으로 각종 대회에 참여하는 게 교육적으로 옳은 일인가?


③담당업무 - 업무추진 상황: 음영 처리된 부분은 교장, 교감이 부여하는 점수다. 너무나 강력한 항목이다. 거의 여기가 급소로 보인다. 이 부분을 정면돌파 그러니까 'B'를 받겠다고 선언하고 나서 '업무 태만'을 즐기자!  그리고 수업 준비에만 집중하자. 


④전문성 개발 - 연수 이수 시간: 교사에게 자기계발의 위한 연수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사이버연수 30시간 이하짜리(시험을 안 쳐도 되는)를 클릭 위주로 듣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런 무의미한 짓 안 해도 된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우리 반 혹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학생들이다. 성과급 'B"를 선언함에 따라 그들과 배움이 넘쳐나는 수업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수업 준비에만 온전히 신경 쓸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는 이 시간들을 퇴근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수업 준비에 사용할 것이다.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학생들과 내가 전인적으로 만나는 하나의 필요조건이 완성된 것에 기뻐하자. 


5. 옳은 것을 따르자.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얘기할 거다.


"00 선생님, 본인이 맡은 업무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그 업무를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맡아서 해야 하고 그로 인해 업무과중이 될 것이며 피해를 볼게 뻔하지 않습니까?"
"네, 저는 그 업무가 수업을 진행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안 할 겁니다."
"물론 그 업무가 수업이나 교육에 필요한 건 아니지요. 하지만 본인이 맡았으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도 방금 그 업무가 수업이나 교육과 상관이 없다고 하셨네요. 그럼 우리 모두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교육적 의미가 없는걸 선생님도 잘 아시네요."
"아니, 그래도 주어진 업무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해야지요."
"교육적인 의미가 없다면 안 하는 게 옳은 거지요. 다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하고 있으니 그런 업무들이 계속 남아있고 생겨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저에게 맡겨진 것이니 전 안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전 성과급 B를 받을 겁니다. 그보다도 더 낮은 등급이 나오면 그걸 받도록 하지요. 전 성과급 지표에 따른 점수 쌓기가 필요 없으니 안 하겠습니다."
"아니, 00 선생님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사람이 어떻게 성과급을 최저 등급 받는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네, 인간적이란 말을 하셨는데 성과급으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를 그깟 168만원에 넘긴 사람이 누구죠? 그깟 168만원에 교직사회에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다 팔아넘겼는데 지금 누구한테 인간의 가치를 논합니까? 얘기 끝났으니 전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란 단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얘기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얘기해? 하는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미셸 푸코가 꼴라주 드 프랑스 강연록에서 말한 '파르헤지아-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로 마무리 짓겠다. 위의 모든 상황들은 바꾸는 건 어떤 교원단체도 아니고 내 주위의 선후배 교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파르헤지아', 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

푸코의 파르헤지아 개념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1년도에 두려움없이 말하기(Fearless Speech)라는 작은 책자가 출간되면서부터다. 1982년 가을 미국 버클리에서 이루어진 강연을 채록한 것인데, 꼴라주 드 프랑스에서 연례적으로 개최했던 대중강연의 내용을 상황에 맞게 요약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을 더 잘 이해하려면 그의 파리 강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2년에 ‘주체의 해석학’, 1983년에 ‘자아의 통치’, 그리고 1984년에 ‘진실에의 용기’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 파르헤지아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는 풀어 설명하면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 즉,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와 관련된다. 고대 아테네에서 파르헤지아는 민주적 도시국가의 조화로운 삶에 봉사해야 하는 시민의 특권이자 의무였으며, 미덕이자 삶의 기술이었다. 민주적 시민에게 그리고 민주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는 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서의 파르헤지아는 진실에 대한 용기, 즉 진실과의 대면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그 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다. 진실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파르헤지아는 솔직함이나 용기와는 다르다. 파르헤지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다른 파르헤지아스트(파르헤지아를 실천하는 자)의 진술과 맞닥뜨릴 때다. 파르헤지아가 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진술이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천하는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진실 생산의 양쪽에 존재하는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윤리적 관계의 표현이다. 단순히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윤리를 포함한다. 따라서 파르헤지아는 타인의 견해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한결같은 용기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것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눈앞에 세우는 용기. 바로 그렇기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 및 실천으로서의 파르헤지아는 동시에 ‘자기지(Self-knowledge)’에 근거한 ‘자기 배려’의 시금석이다. 진리와 주체를 매개하는 실천윤리로서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아의 기술(Askesis)’이다. 즉 파르헤지아는 이성과 진실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자기 배려의 문제이며 자신의 신체와 정신, 나아가 자신의 영혼을 잘 보살피는 자아 윤리일 뿐이다. 
(중략)
그러나 문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진실을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파르헤지아는 언론의 자유 혹은 자유로운 발언의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참된 담론을 확인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면, 진실과 직면하고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는 ‘자아 윤리’의 기초다. 푸코가 사망 직전 천착했던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다. 

-김태원(영미어문학과 교수)

출처: 서강학보
http://www.sg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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