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저 싱가포르로 이사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 임신했어요. 그래서 저 자격증은 그냥 포기하고 졸업만 하고 가서 아기 키우며 살려고요.
"양 선생, 졸업과 동시에 새 생명이 찾아왔네요. 임신 축하해요. 근데 어디로 간다고요?"
"싱가포르예요 교수님"
"여기서 거기까지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한 6시간 정도 걸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미국처럼 아주 멀지도 않네요. 왔다 갔다 할 수 있겠어요. 왔다 갔다 하면서 자격증 따세요. 칼을 뽑았으면 마무리는 해야죠. 자격증 따기까지 필요한 슈퍼비전은 제가 그냥 해드릴게요. 지난 1년간 간사일 도와줘서 내가 고마워서 그래요. 간사하면서 나한테 연락 이렇게 안 하고 잡음 없이 잘 꾸려 나간 사람이 양 선생밖에 없었어요. 나중에 일을 하게 되든 안 하든 일단 따놓으세요"
"정말요? 아... 제안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고민해 보고 확답을 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한국상담심리학회에서 발급하는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대학원에서 필수 과목을 이수했다는 증명과 필기시험, 면접, 상담경력 확인이 필요하다. 학회에서 요구하는 최소 충족 요건이 있지만, 넉넉하게 경력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최종면접을 통해 상담사로서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자격증을 발급해 준다.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미 필기시험과 자격증 취득을 위한 대부분 요건이 충족되어 있었다. 약 30% 정도만 더 정리하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의 제안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나의 전공교수님은 보기 드물게 상담심리사와 임상심리사 전문자격증을 함께 소지하고 있어 내가 필요한 모든 슈퍼비전을 해주실 수 있었다.
(슈퍼비전이라 함은 초심 상담자가 전문가에게 상담케이스에 관한 코칭을 받는 것이다. 상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 최고의 맞춤 공부법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툴기 마련이기에... 물론 전문가들도 슈퍼비전을 받기도 한다. 전문가라고 해서 모든 케이스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마다 더 뛰어난 분야가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생활이 어떻게 흘러갈 것이며, 나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하니 '그래 조금만 더 해서 마무리 짓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먼저 싱가포르로 보내고 나는 서울에 남아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막바지 작업을 시작했다. 학회지에 투고할 논문도 마무리되었고, 자격증 충족 요건도 모두 준비되었다. 나는 졸업, 논문, 자격증 준비 작업을 마무리 한 뒤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싱가포르 무더운 여름날씨에 적응이 되어갈 때 즈음 자격증 면접을 위해 서울로 비행 한번,
학회에 논문 포스터 발표를 위해 비행 한번,
상담심리사 최종합격
임신 중 총 2번의 비행으로 2016년 9월 한국상담심리학회에서 발급하는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 자격증이 어떻게 쓰일지는 미지수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첫째를 출산했고 몇 년간은 아이 키우기에 집중했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국교민을 상대로 한 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을까? 신은 이미 다 계획하셨을까?
드라마 도깨비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간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질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 떠밀어 준다면 그건 신이 당신의 곁에 머물다간 순간이다."
죽음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신이 머물며 나를 다시 인생의 궤도로 밀어 넣어준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분노 가득했던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 중학교 졸업 후 집을 나갔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라고 따끔하게 조언해 준 동네 선배가 있었다. 이 선배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대충 상상해 봐도 삶의 끝자락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두 번째는 바로 이 교수님이다. 교수님의 작은 제안이 나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자격증 없이 석사 졸업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교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그때 만일 포기하고 자격증을 따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고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지금 그 자격증을 따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