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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장롱면허

프롤로그

by 성숙한 영미샘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성인이 된 후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다. 자동차를 몰고 좁은 도로를 운전하는 꿈이다. 현실에서 장롱면허이긴 하지만, 꿈에서는 항상 더 심각했다. 꿈에서는 엑셀과 브레이크의 위치도 헷갈리고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밟아보다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운전을 못하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온몸에 긴장이 돌고 핸들을 너무 꽉 쥐어 손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사고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나는 장롱면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2종 오토 면허를 높은 성적으로 따고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던 때도 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놓은 지 13년이 흘렀다.


나는 K장녀로서 부모님 말 떨어지기 전에 눈치껏 알아서 잘 하던 부모님 해바라기 같은 아이였다. 주변에서는 칭찬이 자자했지만 나라고 다 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반, 어느 대학을 가느냐 하는 큰 선택의 기로에 서있던 시기였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 살겠노라 호기롭게 외치고 부산에서 제주도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은 달랐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고 있고 야외에서 열 띈 토론을 벌이는 로망 가득한 장면은 없었다. 작은 규모의 학교라 사람은 드물게 보였고, 삼다도 제주의 차디찬 바람만이 캠퍼스를 가득 메울 뿐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한숨이 나왔다. 부모님께 큰소리쳐 온 유학이었기에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별 볼일 없는 대학은 뒤로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도 상하고 멋도 없어 보일 것 같았다.


고군분투하는 삶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여름이면 인턴십을 하고, 학기 중엔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이력서에 플러스되는 학교 밖 활동이 뭐가 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가 별 볼일 없으니 나라도 별 볼일 있게 돋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월급 30만원의 달콤함에 다른 학생들은 한 학기도 채우기 힘들어하는 학과 교수님 조교도 했다. 무려 2년, 대학생활의 절반이었다. 정말이지 히스테리 끝판 왕 교수님이었다. 교수님이 버럭 하면 뒤돌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교수님의 감정을 예측하기란 시험 문제 예측하는 것 같이 어려웠다. 하지만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그만둘까 수십 번 고민하고 있을 때면 귀신같이 알아차리시고는 애정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셨다. 가뭄에 콩 나듯 보여주신 애정과 월급 30만원은 내가 2년 동안 버틸 수 있던 힘이었다.


제주도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가는 동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졸업하고 좋은 곳에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답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전도 미숙한 내가 불안감을 가득 안고 내 손과 발로 차를 운전해 나가야 함의 연속이었다. 행여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두려움에 떨며 운전하는 초보의 삶이었다.


꿈에서 운전을 하며 사고가 났던 적은 없지만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당장 해내야 하는 불안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좌절스럽고 앞도 캄캄한 대학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부모님의 전화였었다. 내가 힘들 때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를 걸어오셨다. 경상도 사투리를 팍팍 써가며 “힘들제? 온나! 아빠가 비행기 표 대줄게~!” 하셨다. 아마 이런 전화들이 없었더라면 제주도 생활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어린아이 마냥 엉엉 울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대학생활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유에 흠뻑 취해 원 없이 술도 마시고 열심히 놀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지만 성실히 한 탓에 조기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전국 팔도로 회사 면접을 보러 다녔다. 어려서 안되고, 여자라서 안되고 난 그냥 안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좋았지. 취업전선에 뛰어드니 땅을 뚫고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지하까지 떨어지는 자존감에 정말이지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십 번의 면접 중, 눈이 살랑살랑 오는 날 정장에 뾰족구두를 신고 부산에서 강화도까지 면접을 보러 갔던 날은 잊을 수도 없다. 꽁꽁 얼어버린 땅처럼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내 희망도 꽁꽁 얼어붙었었다. 미끄러지지만 말 자며 숨을 가다듬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졸업 후 1년이 지나갈 즈음에 정식적인 첫 직장을 갖게 되었다. 다시 부산 부모님 집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나의 애정전선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서울내기 다마네기라며 나를 눈물짓게 했던 차가운 서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했던 건 역시 지금의 남편인 구 남친의 사랑과 다마네기 속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 서울내기들이었다.


취업 후 내 20대 인생이 순항하는 것 같았지만 잊을만하면 또 꿈을 꾸었다. 불안감을 가득 안은 채 운전하고 있는 장롱면허 주인처럼 말이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공을 바꿔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내 인생을 함께 할 남자친구와 결혼도 했다. 결혼 2년 후, 첫아이를 가진 채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왔다. 지금은 아이가 두 명에 셋째 같은 내 사업체도 있다. 싱가포르에 와 있는 지난 시간들이 나에게는 가장 암울하기도 했지만 도전적인 시간이었다. 부모님을 떠나 답도 없는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 온건 지난 내 인생의 8할이었지만, 싱글리시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말이라도 통했지, 영어로 인생을 살아가는 건 손이 묶인 채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주저앉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실력이 좋은 심리치료사 선생님을 찾아 연락을 드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진행하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나의 삶을 진심으로 경청해 주셨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주저앉는 나를 다잡아 주었다. 상담 초기에는 평소보다 더 자주 꾸는 불안감 가득 안고 운전하는 꿈이 나를 힘들게 했다.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다 보니 불안감이 더 올라왔던 것 같다.


하지만 치료가 1년 동안 지속되면서 나의 꿈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쁜 아이보리색 클래식 카를 몰고 신나는 마음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속도를 꽤 내며 달리다 가벼운 사고가 나기도 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 후 뒤처리하고 다시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불안감은 이제 희미해져갔다.


그 다음 꿈에선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불안감은 전혀 없이 자유자재로 운전을 하는 내가 있었다. 한 차선은 ‘공사 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길이 막혀 있었지만 나는 우회 도로를 선택해서 휘파람을 불며 그 길을 지나갔다. 가장 최근 꿈에선 화려한 스포츠카를 타고 무엇이 엑셀인지, 브레이크인지 정확히 알고,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도 마쳤다. 그러고는 속도를 내서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인생이라는 도로 위에서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 모른 채 항상 불안하게 살아왔던 내 마음의 무의식을 잘 표현해 준 꿈이었다.


이제는 인생에 대한 답이 생겼을까?

아니다. 여전히 답은 없다.


하지만 대학시절 내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받았던 전화 한 통 너머 부모님의 사랑. 상담 선생님의 지지와 인간애를 통해 받은 위로와 공감. 이것들이 내 마음 안에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싹 틔울 수 있게 해주었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대로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부족한 내 모습이지만 잘 하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답은 없는, 답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모호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다마네기 속 사랑처럼 눈물도 함께 흘려주고 닦아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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