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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걱정이 많아.

빠른 것도 걱정이야.

by 연하일휘

손가락 끝이 서로 맞닿으며 꼼질거린다. 괜스레 바닥을 끄는 발끝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무릎을 굽혀 두 팔을 벌리니 쑥스러운지 제 엄마 뒤로 쏙 숨더니만 밝은 웃음을 지으며 안긴다. 한 달 만에 본 친구네 아가가 훌쩍 커 있다. 이모 기억해? 품에 안기고서도 슬며시 눈을 피하더니,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말한다. 뒤에 붙는 '이모'라는 소리가 귀여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쓰다듬는다.


눈만 마주쳐도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가 훌쩍 컸다. 조카보다 4개월 빠른, 친구의 아기를 보러 갈 때면 낯가림에 눈물방울이 맺힌 얼굴을 가장 많이 마주했었다. 그랬던 아이가 이젠 '이모'라 부르며, 보고 싶었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예뻐'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무엇보다도 친구의 얼굴을 쏙 빼다박아 더 예뻐 보인다. 너 나중에 엄마한테 고맙다고 해- 장난스럽게 하는 이야기지만, 예쁘긴 참 예쁘다.


그런데 요 예쁜 녀석보다도 친구가 더 인기인이 된 요즘이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일 수도 있지만, 예쁘고, 차분하고, 무엇보다도 들어주기를 잘해 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에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친구의 인기 비결은 내가 알고 있는 장점이 아닌, 요 작은 녀석 덕분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참관일에 꾸미고 오라더라."


엄마들의 기싸움인가 싶었던 궁금증은 당일에서야 해소되었다. 같은 어린이집 학부모들이 친구에게 비결을 묻느라 정신이 없었단다. '엄마, 아빠' 소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의 말문이 금방 터졌다. 단어 습득 속도가 그리도 빠르더니만, 금세 문장을 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어린이집 언니, 오빠들보다도 말을 잘하는 아이 덕분에,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친구는 힘겨운 인기인 생활을 하는 중이다. 따로 뭘 가르친 게 없는데 말야- 질문 공세 가운데에서 딱히 해 줄 말이 없다는 친구는 난감한 듯 말은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다.


새로 산 장난감을 자랑하려 내 손을 잡아끄는 아가의 뒤를 쫓는다. 이모가 악어 만들어죠요- 블록 놀이를 손에 쥐어준다. 이모 만들 줄 모르겠어- 작은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악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쌓아놓은 블록을 옆으로 치우며, "이모가 만들어줬으니까, 이제 내꺼 만드꺼야."라며 새로운 탑을 쌓기 시작한다. 이모는 구경밖에 안 했는데. 이것도 네가 만든 거란다.



cute-8754622_1280.png Pixabay



"애가 너무 빠르다 보니까, 뭐부터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 상담을 받을 일이 있으면, 친구는 우선 신청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발달이 빠른 덕분에 고민이 많다.


"내가 아이 발달 수준에 맞추지 못할까 봐 걱정돼. 그렇다고 애가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게 하고 싶지는 않고."


"차라리 느리거나 보통의 속도였으면, 가이드라인이라도 있었을 텐데. 빠른 것도 고민이 많긴 하겠네."


부모의 게으름 때문에 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놓칠까 걱정도 되지만,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힘들게 할까 걱정이 많았다. 한쪽 벽에 한글과 숫자 놀이 자석들이 붙어 있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애가 빠른 편이었는데, 지금쯤부터 놀이처럼 한글 가르쳤다고 하더라고- 상담과 여러 사람들에게서 얻은 조언들로 친구는 아이를 가르치는 방향을 잡아 나가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놀이를 하고 있지만, 역시나 다른 장난감에 비해서는 선택되는 일이 없다며 웃는다. 워낙 눈치가 빠른 아이라서, 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공부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네.


"엄마, 도와죠요."


혼자 기차 레일을 연결하다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친구는 한껏 높아진 톤으로 부드럽게 대답하며 아이를 도와준다. 20년을 넘게 봤지만, 아이 엄마가 된 친구의 모습은 색다르다. 부드럽지만 시니컬하던, 밝음 보다는 옅은 우울이 깔려있던. 나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던 친구가 사랑에 빠진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엄마가 하나를 연결해 주니, 그 뒤부터는 저 혼자 연결을 해 나간다. 엄마와 이모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니 슬쩍 끼어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와 아빠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아마 말이 빨리 트인 게 아닐까- 아이의 모습에 친구의 추측이 꽤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아이와 눈을 마주친다. 그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 중간중간 손을 거들어주며 함께 웃는다. 아이를 위해 해 주고 싶은 일들은 많지만, 아이의 웃음을 우선하려는 친구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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