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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 말 좀 믿어봐 봐

작은 효도를 한 날.

by 연하일휘

부엌 한 편을 차지한 큰 기계 하나는 하루에 한 번씩 큰 모터소리를 낸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려올 적이면 줄어든 집안일 하나에 작은 만족감마저 딸려온다. 고무장갑을 끼고, 접시 하나하나를 거품 내서 닦아낸 뒤, 물로 헹구는 그 과정이 얼마나 귀찮은지. 괜히 식기 세척기를 향해 '이모님'이라는 소리를 괜히 하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진다.


명절이나 묘제를 지내고 온 뒤면, 유독 이모님이 그리워진다. 부모님 댁 싱크대에 쌓여 있는 기름기 묻은 접시들을 볼 적이면, 들고 집으로 가고 싶다. 그냥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식세기에 돌리면 안 되나. 설거지를 할 때마다 어머니께 '식기 세척기 하나 사자.'라는 이야기를 해도 필요 없다는 반응이다.


"식기 세척기는 무신. 싱크대나 먼저 바꿔야 해."


매일 설거지를 하는 내가 아닌, 어머니가 필요 없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고. 툴툴거리며 기름기를 닦아낸다. 그러다 여동생네 집에도 식기 세척기 한 대가 자리를 잡는다. 조카가 커 가면서, 식기가 늘어난 데다 둘째를 기다리며 집안일을 덜기 위한 선택이었다. 유심히 여동생네 식기세척기를 살펴보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대화를 나눈다. 꽤 편리하다는 말에 어머니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 지금이구나.



Pixabay



묘제를 지내고 난 뒤, 어머니께 다시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다.


"식기 세척기 하나 있으면 어때?"


"편하긴 하겠더라-"


여동생에게 '제부 좀 빌릴게-' 전화를 하고 함께 식세기를 알아본다. 쇼핑몰을 살펴보기도 하고, 반품샵을 돌아다니다 모서리가 조금 찌그러진 제품 하나를 발견했다. 대신 40% 할인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냉큼 들고 와 버렸다.


싱크대 위에 있던 물건들을 내리고 제부의 도움으로 식기 세척기를 설치한다. 6인용의 위용을 자랑하듯 부엌 한 편을 가득 차지한 녀석 덕분에 부엌이 더 좁아 보인다. 하지만 설치가 끝난 이후, 어머니의 눈이 반짝인다. 내가 사자고 할 땐, 필요 없다고 하더니만- 투덜거림을 건네니, 그땐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대답과 어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돈 같이 모아서 어버이날 선물로 사지. 왜 그렇게 무리했어."


"용돈 드리는 게 엄마아빠 더 좋아하더라고. 대신 나 어버이날에는 돈 안 낼 거야. 나 빼고 용돈 모아서 드려."


가족톡에 올려놓은 사진에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같은 브랜드의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는 언니는 미안함을 표하며,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들떠있었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전에는 사 준다고 해도 싫다 하더니만, 요전번에 갖고 싶은 티를 좀 내더라구- 언니와의 대화를 이어가다 문득, 그럴듯한 가설이 떠오른다.


집안일은 꽝인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하며, 어머니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곤 했었다. 자취 초기에는 직접 집에 와서 청소까지 해 줄 정도였으니. 이후로 혼자 요리를 해 먹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었다. 네가 요리도 해? 요리해야지. 굶어 죽을 수는 없는데. 서툰 요리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둘째 딸의 살림 실력을 알기에 식기 세척기를 예찬하는 말들이 영 미덥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언니네 집에도 놓여있는 그 커다란 녀석, 그리고 요리면 요리, 청소면 청소. 손끝이 야무진 여동생도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니 그제야 믿음이 간 모양이다.


내가 좋다고, 편하다고, 내 손으로 하는 것보다 더 깨끗이 기름때 제거해 준다고 말했을 땐 믿지도 않더니만. 속으로 투덜거리지만, 어쩔 수 있나. 혼자 사는 것이 신기한 둘째딸의 말이라 못 미더웠다는 대답이 돌아와도 할 말이 없긴 하다. 언니와 여동생 덕분에 선물 하나를 주게 된 것에 고마워해야지 뭐.


싱크대에 놓아두었던 접시들을 대충 물로 헹구며 식기 세척기에 담는다. 테트리스를 하듯 요리조리 접시들을 끼워 맞추고, 툭- 세제를 던져둔 뒤 전원 버튼을 누른다. '설거지 잘 되더라- 막내 말대로 끝나니까 문이 혼자 열리대?' 뒤늦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후기를 전하는 어머니에게 부러움을 표한다.


"내껀 자동 문열림이 안 돼서, 끝나면 직접 문 열어줘야 해. 그거 진짜 귀찮은데."


어머니가 웃는다. 아픈 아버지를 돌보느라, 그 와중에 일을 다니느라 피곤할 어머니의 집안일 하나가 덜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몰래 전한다. 싱크대를 통째로 바꿔주진 못했지만,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은 효도잖아.




ⓒ 연하일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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