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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바람, 바람

바람이 강했던 그날

by 연하일휘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에 익숙해져, 이젠 강아지도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삼다도, 여자. 돌. 바람이 많은 곳이라 하는 이름에 걸맞게, 예기치 않은 강풍이 몰아치곤 한다. 바람에게 세차게 뺨을 맞게 되는 겨울만 아니라면, 언제나 바람은 반가운 존재다. 한 여름에 시원한 그늘에서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 앞에서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역시 인위적이지 않은 바람이 주는 상쾌함이 좋다.


어제저녁부터 간간히 덜컹거리던 바람소리가 시작되더니 오늘은 꽤나 센 바람이 부는 날이다. 아침에 눈을 뜨며 오랜만에 추위를 느꼈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창문 틈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온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선 집안 온도를 확인한다. 실내온도 18도? 추울 기온이 아님에도 왜 이리 추위가 느껴지는 건지,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찰나. 강아지가 산책을 가자며 동동 뛰어다닌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아지의 애교, 결국 든든하게 옷을 껴 입고 밖으로 나선다.


나설 때의 추위는 이내 가시면서, 걷다 보니 조금씩 몸에서 열이 오른다. 잠을 자면서 체온이 내려간다고 하던데, 그래서 일어나며 추위를 느낀 건가 보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얕은 바람이 그동안 살랑거리는 벚꽃비를 만들어내더니, '꽃놀이는 이제 끝났다!'를 외치듯 가지가지마다 꽃잎들을 털어내 버렸다. 한동안 눈으로 즐기던 벚꽃들의 자리가 휑하게 비어있다.


오늘은 아버지 병원 진료가 있는 날, 오전 중에 글 한 편을 목표로 하였는데. 병원과 출근, 할 일이 겹쳐지다 보니 오전 내내 게으름을 부리고 말았다. 그 덕분에 부모님 모시러 가기로 한 시간도 조금 늦어버리고. '보상심리'라는 게 있다던데, 나는 어째서 늘 일을 하기 전에 미리 보상심리가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퇴근한 뒤에 글도 공부도 집중이 더 잘 되는 건, 몸을 움직이면서 게으름이 조금 도망가버린 덕분일까. 혹은 야행성 인간이라서 어두워진 이후부터 집중력이 향상되는 탓도 있는 걸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하얀 구름들이 내려앉은 듯하던 나무들마다, 가지 끝에 자리 잡은 작은 분홍빛들과 듬성듬성 남아있는 하얀 꽃들과 어우러져 있다.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꽃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부모님을 내려드리고 그늘진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창문을 열어둔다. 세찬 바람이 차 안으로 한가득 밀려들어오면서, 기분 좋은 살랑거림을 만들어낸다. 나 혼자만 '기분 좋은 살랑거림'이지, 저 앞에 보이는 나무들은 힘차게 휘청거리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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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이어진 귀찮음 덕분인지 병원에 올라오면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었던, 어머니의 커피를 사러 걸어내려 가는 것조차 귀찮아진다. 그러고 보니 선물 받은 기프티콘이 있었지. 날도 좋고, 차 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커피를 사러 걸어 내려간다. 바람 덕분에 머리가 한껏 휘날린다. 머리 감은 후에, 드라이가 따로 필요 없겠네. 커피를 사서 다시 차로 돌아오며 비어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끈질기게 남아있는 꽃들과, 꽃이 있던 흔적들만 남아있는 나무. 꽃이 져 버렸다는 아쉬움보다는 이것도 나름대로 아름다워 보인다. 가을의 텅 빈 나무는 메마른 느낌이지만, 봄의 나무는 비어있어도 메마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초록 잎이 채 나오기 이전에 바람에 의해 떨어져 버린 꽃들, 분홍빛 끄트머리들이 모여있으니 오히려 생기 있다고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하늘이 맑다. 맑은 하늘에 남아있는 꽃들과 비어있는 가지들의 조화가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저쪽 골목에는, 여전히 하얀 꽃들이 남아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꽃구경을 위해 평소에 가지 않던 골목길로 들어섰다.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나무라서 바람의 손길을 적게 받았나, 아마 이게 마지막 벚꽃일지도. 한껏 꽃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후회가 밀려온다. 평소에 이 골목길을 들어서지 않던 이유가 있었는데. 다른 길보다 조금 더 가파른 오르막이다. 꽃구경은 잠시의 만족일 뿐, 이미 장착된 게으름은 쉬이 사라지지 않나 보다.


내리쬐는 햇빛이 10분 남짓한 시간만에 얼음을 잔뜩 녹여버렸다. 아이스커피는 다 좋은데, 얼음이 녹으며 밍밍해지는 맛이 영 불만족스럽다. 텀블러를 챙겨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귀찮음과 게으름의 합작으로 늦게서야 부랴부랴 집을 나서며 텀블러를 챙길 생각을 하질 못했다. 에휴, 어떻게 하면 부지런해질 수 있으려나.


그늘진 곳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좋아하는 바람을 쐬는 이 시간을 만끽한다. 기분 좋다, 병원 진료 후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올 곳이 있어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여유로이 보낼 수 있는 그 순간만은 큰 만족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오늘 미세먼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하던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몸에 먼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다.


손이나 얼굴, 그리고 옷에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묻어난다. 혹시, 바람이 얼마 되지 않는 미세먼지들을 몰아다가 내 몸에 잔뜩 붙여놓는 것은 아니겠지? 기분 좋은 온도와 바람에 의한 만족감이 실시간으로 묻어나는 찝찝함에 희석되어 간다. 아, 왜. 그냥 기분 좋게 바람만 쐬면 안 되는 거야! 먼지는 다른 데로 좀 보낼 것이지, 야속한 바람 같으니라고!



- 바람이 강했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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