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앞부분에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여느 마트라면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의자를 펼칠 수 있는데, 이 마트는 예외였다. 도매를 중점적으로 하는 곳이라 그런가. 옆에서 제 또래 아이가 카트 안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선 조카도 카트에 앉혀 달라며 팔을 내민다. 어머니와 제부, 그리고 조카까지 함께 마트 구경을 나섰다. 사야 할 물건 목록들 대신, 가벼운 나들이의 마음으로 낯선 공간을 거닌다.
"와, 여기 괜찮은데요?"
큰 덩어리채로 판매되는 고기를 보며 제부는 눈을 반짝인다. 요리를 좋아하는 제부는 다양한 식재료들에 관심이 많다. 큰 정육점에서도 구하지 못했다는 우설 한 덩어리를 카트에 집어넣으며 요리 레시피를 구상한다. 꼬기! 대지? 소? 아빠가 카트에 집어넣는 식재료들을 만지작거리며 조카가 단어들을 나열한다. 벌써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알다니. 너 너희 아빠 아들 맞나 보다. 조금만 더 자라면 아빠와 함께 나란히 요리를 하고 있을 조카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대용량으로 판매하는 식재료들은 어머니나 제부에게는 적합하지만, 내게는 너무 과하다. 요리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더 못하는. 못하니까 더 좋아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에 걸린 나로서는 대용량 식재료들이 부담스럽다. 그나마 자주 먹는 달걀은, 왜 3판을 묶어서 판매하는 건지.
"한 판씩 나눠서 가져가면 되겠네."
부모님 댁, 제부, 나. 이렇게 한 판씩 나누기로 하며 카트에 집어넣는다. 아직 달걀 트레이에 몇 알이 남아있으니, 먼저 처리를 하고 새로 정리를 해야 할 텐데. 먹을만한 달걀 요리를 떠올려도 훈제란 정도밖에 생각나질 않는다. 전기밥솥에 달걀을 넣고, 물을 자작하게 부은 뒤에 취사 두 번. 요리를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좋아하는 레시피다.
물을 적게 넣을수록 달걀에 짙은 갈색이 입혀진다. 부들거리는 흰자는 갈빛이 돌수록 쫀득한 식감과 함께 고소한 향이 배어난다. 달걀 특유의 비린내도 짙은 향 아래에서 구수하게 바뀌기에,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의 궁합이 참 좋다. 거뭇한 달걀의 껍질을 까 내릴 때면, 풀잎들 위에 놓인 접시에 조심스레 달걀을 올려놓던 정경이 떠오른다. 먹고 싶다던, 꿈속의 이야기를 듣고 충동적으로 찾아갔던 그날의, 풀잎들의 사각거림이 들려온다.
갈빛으로 물든 방,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할머니 곁을 지킨다. 텔레비전에서 잔잔히 들려오는 소리들 너머로 거실의 말소리들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별다른 대화가 없어도, 편안한 시간. 간간이 방으로 들어서 할머니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친척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는다.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저거 먹고졍 헌디-
훈제란? 그거 만들기 쉬워. 전기밥솥에 물 조금이랑 넣고 취사 두 번만 누르면 돼-
할머니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얼굴에 비춰 보이며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가 해줄까? 할머니가 웃는다. 그 웃음을 바라보다 잠에서 깨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냉장실 문을 열었다. 달걀 몇 개를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어머니께 전화를 건다.
"할머니가 꿈에 나왔는데, 훈제란 먹고 싶대. 나 만들어서 다녀오려는데, 엄마아빠도 갈래요?"
괜찮다는 대답에 혼자 산을 오를 준비를 한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빵, 그리고 김밥, 술 한 병과 함께 조리가 끝난 훈제란을 따로 통에 담아 산을 향한다. 주기적으로 벌초를 하지만, 그새 묘소 근처에는 파란 잎들이 올라와 있다. 향을 피우고, 그릇들에 준비해 온 음식들을 꺼낸다. 하얀 플라스틱 접시가 풀잎을 짓누르며 제 자리를 찾는다. 조촐한 음식들 사이로 술을 따라 올리며 절을 한다.
먹고 싶었던 걸까, 혹은 오랜만에 손녀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걸까. 사각거리는 풀잎들의 흔들림을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마워, 할머니.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풀잎들과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며 모기나 벌레에 물릴 법도 하건만, 할머니가 와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일까. 한참을 앉아 있어도 물린다거나 하는 피해가 없다. 내가 그래서 할머니가 참 좋아.
머릿속으로 달걀 몇 개가 남았나를 가늠한다. 이번에도 만들어서 할머니에게 다녀올까. 고민들을 이어가다 부모님 댁에 들러 짐들을 내려놓는다. 달걀을 소분하기 위해 노끈을 자르자, 조카가 신기한지 덥석 달걀 하나를 손으로 잡아버린다. 아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이모의 말이 재미있는 듯, '아이고'를 따라 하는 조카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플라스틱 의자에 조카를 세워 놓고 함께 손을 씻는다. 집에서는 핸드워시를 사용하지만, 비누로 손을 씻으니 감촉이 좋은 듯 비누 장난에 푹 빠져버린다.
"미끌미끌하지?"
"미끌미끌!"
해맑은 조카의 모습에 함께 웃음을 터트린다. 너 조금만 더 크면, 이모랑 같이 할머니에게 다녀오자. 먼 곳에서도 사랑을 보내주고 있을, 할머니를 함께 보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