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아니면 도
두껍게 쌓인 먹구름을 손으로 떼어 휙- 던져버리고 싶은 아침이다. 새벽녘 창틀을 흔들어대던 거센 바람이 저 검게 물든 구름 더미들을 흘려보내진 못한 모양이다. 소나기가 잦다. 햇살의 따스함을 밀어내는 찬 바람이 우세를 점하고 쉽게 쏟아지는 차가운 빗방울에 몸이 움츠러든다. 바짓단을 적시는 빗방울들은 추위만 선사하는 것이 아닌 다른 고민까지 끌고 와 버렸다. 예측 불가의 날씨 덕에 빨래들이 쌓여간다.
"만약 내일도 비가 내리면 또 건조기 좀 빌릴게."
여동생에게 미안함을 담아 말은 꺼냈지만, 요즘 건조기를 빌리는 횟수가 너무 늘어났다. 여동생은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듯하지만, 네 식구의 빨랫감도 무시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미안함이 커져간다. 오전에 확인한 일기예보 상으로는 비 소식이 없다. 하지만 저 어둑한 하늘은 예보를 의심하게 만든다. 세탁기를 돌려, 아니면 내일로 또 미뤄?
모 아니면 도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빨래 다시 돌리고, 건조기 빌려야지 뭐.
한가득 쌓아 둔 빨래들을 세탁기에 던져 놓고 텅 빈 바구니를 보니 이제야 마음이 좀 후련하다. 여름보다야 갈아입는 옷의 개수가 줄어들었지만, 조카의 애정 어린 포옹 덕에 옷을 자주 갈아입게 되는 요즘이다.
소파에 앉아 조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다, 콧물이 주룩 흘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코 닦을까? 말을 꺼내자마자 조카가 도도도 달려와서는 품에 폭하고 안긴다. 이모 품에 얼굴을 박고 한번 껴안더니 고개를 들고 방싯 웃는 조카의 얼굴이 묘하게 깨끗하다. 그리고 옷에 물기가 묻어난 자국 여러 개.
"얘 침 닦은 거야, 아니면 코 닦은 거야?"
"둘 다일걸?"
똘똘하다. 코 닦자- 라면서 티슈로 닦는 것을 싫어하더니만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신박하게 닦아내는 조카다.
가끔 기저귀를 갈고 자유로운 시간을 주면, 이모 무릎에 앉아 쉬야 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처음에는 품 안에서 쉬-를 하자 깜짝 놀라 수건을 찾다가 조카를 울려버렸던 초보 이모다. 놀라면 안 돼- 나중에 애기 기저귀 뗄 때 힘들대- 여동생의 말을 듣고 이젠 좀 업그레이드된 이모는 여유롭다. 무릎에 앉아 책을 읽다가, 혹은 조카를 품에 안고 있다가 뜨끈해지는 감각이 이젠 낯설지 않다. 괜찮아. 애기 쉬야는 냄새 안 나더라. 냄새는 안 나더라도 세탁은 당첨이다.
옥상 빨랫줄에 빨래를 널면서도 햇빛조차 가려버린 구름들을 연신 바라보게 된다. 저거저거, 비 쏟아지면 한바탕 크게 쏟아 내릴 것 같은데. 이미 돌린 빨래들을 다시 들일 순 없으니 마음먹은 대로 밀고는 나간다. 부디 출근해서, 작은 내적비명을 지를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
아차, 그런데 늘상 한 가지를 후회한다. 출근 전 샤워를 하며 또 빨랫감이 나온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샤워 먼저 하고 빨래를 돌렸어야 했는데, 매번 생각만 하다가도 깜빡 잊어버린다. 몇 안 되는 빨랫거리들의 운명은, 다시 차곡차곡 쌓인 뒤에 세탁기로 들어갈까. 혹은 날씨에 져버린 옥상의 빨래들과 함께하게 될까.
출근길,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어둑하던 하늘 사이사이로 작은 빛들이 비쳐 내려온다. 도착 무렵에는 파란색이 뒤덮인 하늘을 마주한다. 바람도 제법 부는, 그리고 햇살까지 비추는. 빨래가 마르기에는 딱 좋은 날이다. 세차만 하면 비가 오던, 꽝을 뽑는 나날에서 오랜만에 당첨을 뽑은 날이다. 며칠간만 햇살을 더 마주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두꺼운 이불도 좀 빨게. 내일의 빨랫거리들을 미리 고민하는, 기분 좋은 당첨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