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손자
서늘한 공기가 목깃을 따라 등줄기로 흘러내린다. 옷을 여며 작은 틈새들을 감추려 하지만, 이른 아침의 공기는 집요하다. 포근할 것이라던 주말이지만 해가 제 기운을 차리지 못해 밤사이의 냉기가 집안에 머물러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열선을 햇빛의 대용품 삼아 몸을 녹인다. 조카들을 위한 백일해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는 날, 이른 시간부터 외출 준비를 한다.
조카도 A형 간염 예방접종을 하는 날이다. 동생네를 들리자, 누워있는 제부 위에서 신이 나 소리를 지르는 조카를 마주한다. 이모 왔다- 한차례 더 아빠의 배 위에서 점프를 하더니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 내 품에 안긴다. 이모랑 공룡옷 입고 빠빵 탈까? 제 옷을 가지러 가는 줄 알았던 조카는 여동생의 외투를 잡고 질질 끌며 엄마! 엄마! 를 외친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은 아빠 외투를 잡는다. 오늘은 엄마랑 이모랑 갈 거야. 아빠는 빠빠하자. 잠시 손에 쥔 옷을 잡고 고민하더니 그제야 제 옷을 입기 시작한다.
"빠빠-"
아빠와 멍멍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대문밖을 나선다. 냉기 사이로 작은 온기들이 천천히 퍼져나간다. 햇살이 천천히 공기를 데우고 있다. 조금 먼 거리를 이동하기 전, 동네 카페에서 동생과 커피 한 잔씩을 구입한다. 사장님은 조카에게 주는 서비스라며 뽀로로 보리차 한 병을 추가로 건네주신다. 아직 뽀로로 영상을 보여준 적도 없건만, 장난감에 그려진 캐릭터들에 대한 친근감 때문인지 조카는 발을 구르며 신이 났다. 조카의 신이 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꽤 괜찮은 하루의 시작이다.
병원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몇몇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도 울음이 맺힌다. 혹여 울음이 전염될까, 고개를 갸웃대는 조카를 안아 들고 어항 속 열대어들을 구경한다. 조카는 작은 열대어들을 연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애기!'를 외친다. 네가 애기인데, 누구더러 또 애기라고 하는지. 조카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름이 불리자 조카를 안아 들고 함께 진료실로 들어선다. 자동차가 그려진 벽지를 보며 조카는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혹시 주사도 자동차에 정신 팔린 틈에 슬쩍 맞을 수 있는 거 아냐? 이모의 착각을 제대로 깨트리듯 조카는 알코올솜이 닿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을 가려 몸부림을 친다. 제대로 꽉 붙잡았어야 했는데, 나중에 시퍼렇게 멍이 들지도 모른다는 말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가인데, 이모가 생각이 짧았네.
엄마 품에서 몇 번 토닥이니 울음을 금세 멈춘다. 이모도 꾹 하네- 엄마의 말에 이모가 주사 맞는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오늘 샤워는 하셔도 되고, 술이랑 사우나는 안 돼요. 아기는 오늘 사워 안 되구요- 선생님의 주의 사항을 듣고 함께 병원을 나선다. 동그란 얼굴에 둥근 눈물방울 몇 개가 맺혀있다. 이모도 아팠는데, 요 조그만 녀석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이모가 미안해-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뒤늦게 등을 토닥인다. 이제 묵직해져 버린 조카의 무게가 팔뚝에 걸쳐진다. 이를 시작점으로 하듯, 천천히 팔에 작은 통증이 퍼져나간다.
"백일해 아프다고는 들었는데 장난 아니네-"
조카를 카시트에 앉힌 뒤 등받이로 몸을 깊이 누인다. 작은 점에서 천천히 그 크기가 번져나간다. 오랜만에 느끼는 욱신거림이다. 아침부터 신이 났다가 한차례 울기까지 한 조카는 졸린지 작은 눈을 깜빡인다. 몇 번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지르던 탄성이 점차 작아지며 줄어든다. 여동생과의 대화도 소리가 줄어든다. 시장에 같이 가 달라는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온다. 통증 때문에 핸들이나 잘 돌릴 수 있으려나. 작은 걱정이 들지만, 출산 후 회복이 더딘 언니를 위해 다녀와야겠다는 어머니의 말이 이어진다.
애기는 네가 안아서 가고, 나는 어머니랑 시장 갔다 올게- 소곤거리며 나눴던 대화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평소에는 고요하던 동네가 오늘따라 소란스러워 조카의 짧은 단잠이 깨어버렸다. 결국 잔뜩 짜증이 나 버린 조카를 데리고 함께 어머니를 모시러 간다.
"함미! 함미!"
외할머니를 본 조카가 신이 나 소리를 지른다. 애기 주사 맞았는데 열나면 어쩌려고- 밝은 얼굴로 손자를 품에 안아 드는 것과 대조적으로 어머니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다. 이건 부작용 별로 없는 거라 괜찮아- 여동생의 말에 어머니는 걱정을 덜었다는 듯, 손자와 함께 창밖 구경을 시작한다.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하는 조카는 수조 앞에서 간간히 멈춰 선다. 살아 움직이는 생선들을 보며 신기해하다 빠빠- 인사를 건네며 작은 두 다리를 움직인다. 잠깐 계산을 하러 할머니가 손을 놓을 때면, 빨리 오라며 함미! 를 크게 외친다.
기념품 가게에 진열된 작은 인형 열쇠고리들 앞에서 조카가 멈춰 선다. 인형을 유독 좋아하기에 처음 보는 동물들의 인형에 푹 빠져버렸다. 잠시 가게 안으로 들어섰던 어머니는 작은 모자 하나와 자동차 열쇠고리를 들고 나온다. 조카는 그 선물이 마음에 드는 듯 할머니 품에 안겨 자동차를 만지작거린다.
"아휴, 이젠 많이 무겁네."
어느샌가 조카는 한 손으로는 자동차를, 한 손으로는 할머니를 꼬옥 잡고 걸어간다. 조카에게는 길었을, 어머니에게는 짧았을 나들이가 마무리된다. 조카는 차 안에서도 할머니와 꼭 붙어 앉아 한껏 신이 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통증이 번져나간다. 팔꿈치까지 욱신거린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찾아오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다른 손으로 핸들을 고쳐 잡는다. 뒷좌석에서 조카의 신이 난 목소리와, 그래그래-라며 손자에게 한껏 애정을 쏟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아픔을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에 조금 더 아픈 날. 작은 눈물 방울이 흘렀지만, 그 위로 덮인 웃음들이 따스했던, 행복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