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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보내는 잡념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날

by 연하일휘

창틀을 한차례 흔드는 바람 뒤로, 으르렁 거리는 듯한 천둥이 뒤따른다. 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회색 구름들로 뒤덮이며 굵은 빗방울을 바닥으로 떨구기 시작한다. 방 안을 메우는 서늘한 공기에 책상 아래 있던 담요를 끌어당긴다. 슬슬 이 담요도 담아둘 예정이었는데, 아직은 그 시기가 오지 않은 듯하다.


제 쿠션에 누워있던 녀석이 꼼질거리며 다가와서는 담요를 탐낸다. 야, 누나도 추운데- 얼마 전 미용을 하며 맨몸이나 다름 없어진 녀석도 추운 걸까. 결국 강아지를 품에 안아 들며 함께 담요를 덮는다. 복실거리던 털이 사라지니, 손끝으로 까끌거리는 감각이 전해진다. 품에서 자리를 잡다 간간이 고개를 들어 애처롭게 바라본다. 산책을 가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이런 날 나가면 너 감기 걸려- 들리지 않을 말을 들려주며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여기 이쪽에 뭐가 났더라고요. 살짝 스쳤는데, 상처는 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가며 아가의 몸에 작은 뾰루지 같은 것들이 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노화의 흔적이라는 말뿐, 스케일링을 하며 제거도 시도해 봤지만 다시 올라오는 통에 이젠 포기해 버렸다. 상처만 안 났으면 됐지. 아직은 조금 서늘한 날씨에 강아지가 품으로 파고든다. 갑자기 더워지기 전에 미용을 하려 했던 건데, 감기라도 걸릴까, 이불로 대신 꽁꽁 싸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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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하일휘




빗줄기가 굵어진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시간을 외면하게 되어 버린다. 저 빗속을 뚫고 출근해야 한다니. 몇 안 되는 우산들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녀석을 손에 쥐고 집을 나선다. 평소라면 거리가 있더라도, 마음 편한 공터에 주차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비를 맞기 싫어 가까운 곳을 찾아 헤맨다. 서늘해진 날씨에 빗방울이 튀어 오르며 바짓단을 적시는 그 감각이 싫은 탓이다.


"너 왜 다 젖었어?"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머리칼에 다급히 드라이기를 꺼내 손에 쥐어준다. 비가 올 줄 몰랐다는 학생의 옷도 다 젖어 있다. 얇은 겉옷을 손에 받아 들며, 강의실에 두었던 담요로 학생을 둘둘 말아준다. 그리고 난로 앞에 안착. 감기 걸리면 어쩔 것이냐는 잔소리도 덤이다.


"근데 제 친구들은 지금 비 맞으면서 축구해요."


"젊음의 힘인가....?"


이젠 비가 오면, 몸을 사리게 되는 나와 달리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열망에 감탄을 하게 된다. 겉옷을 널어두며 아이의 상태를 살핀다. 비가 오며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탓에 금세 감기가 찾아올 것만 같은 날이다.


"낼모레 어린이날에 실컷 놀아야 하는데, 감기 걸려서 못 놀면 속상하지 않겠어?"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주말을 포함해서 4일을 놀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어린이날에 대한 기대 덕분일터다. 식물들이야 비 맞고 쑥쑥 크겠지만, 사람은 비 맞아도 안 커- 아프기만 해- 이건 아이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나와 우리 강아지에게도 통용되는 말이겠지만. 아이는 어린이날 선물보다도 친구들과의 약속에 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한다. 어느샌가 선물 같은 물질적인 것들 보다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해지고 즐거워진 걸까. 네가 많이 크긴 컸구나.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도 들었건만, 5월이 되면서도 아직은 꽤 쌀쌀하다. 여름옷들을 미리 꺼내 놓았지만, 낮에는 반팔을. 그리고 밤에는 도톰한 겉옷이 있어야만 하는 날씨다. 원래 봄이 이랬던가. 늘 너무나 짧게만 지나갔던 봄이 어떠했는지 다 잊어버렸나 보다. 그래도 햇빛 아래의 포근함 속에서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봄이 맞는 거겠지.


유리를 두드리던 빗소리가 그친다. 군데군데 파란 하늘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퇴근할 땐,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려나.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도 파랗게 물들어 있다. 연녹빛의 여린 이파리들이 어느새 진한 제 색을 뽐낸다. 봄이 지나가며 나무들이 성큼 여름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아이들도 새 학기에 적응하며 훌쩍 커버리는 요즘. 사람은 비를 맞아도 안 큰다고 하였지만, 아닐지도 몰라. 봄의 단비 몇 번, 여름의 장맛비 몇 번에 몸을 적시면서 새싹처럼 훌쩍 커버리는 것일지도.


봄의 마지막 비가 아닐까, 지레짐작으로 작은 추측을 한다. 이 비가 끝나면 갑작스레 여름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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