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에 빗방울의 발자국이 남겨진다. 토도독-부딪히는 소리들이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어 낼 때면, 가만히 앉아 그 자국들을 더듬어 간다. 비가 오는 아침이다.
눈을 뜨며 이불 틈새로 스며드는 한기에 잔뜩 몸이 움츠러든다. 한동안 따뜻함에 취해 전기장판을 켜지 않고 잠이 든 것이 문제였을까. 강아지가 밤새 이불 삼던 겉옷을 챙겨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적막함이 가라앉아 무거워진 공기는 '혼자'라는 외로움이 만들어 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들이 공기와 온기마저 차갑게 끌어안으며 빗소리만 남겨둔 탓이다.
오늘은 산책 못 가겠다. 누나의 말을 알아듣긴 하는 것인지, 강아지는 끼잉-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린다. 강아지의 발소리가 집안의 적막을 깰 때서야, 비로소 아침이 시작됨이 느껴진다. 좋다, 고요하게 시작하는 하루는 너무 빠르지 않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노트북을 켜고 전날 마무리하지 못한 파일들의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나 스스로 훑어봐도 도무지 완성물이 괜찮은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꺼내둔 탓인지, '미안해'라는 말을 몇 번 더 붙이며 친구에게 확인을 부탁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면, 수정보다는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 시작하고. 통과가 되면 다행이고. 답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두근거리는 긴장감의 연속이다.
핸드폰이 울리자 흠칫 놀라고 만다. 아, 시간을 보니 아버지께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외출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니, 집안보다 더 찬 공기를 맞이한다. 봄이면 늘 실내가 더 추웠는데, 해가 숨어버린 빗줄기에 봄의 기운이 사그라들어버렸다. 회색빛 콘크리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튀어 오르며 들러붙는다. 춥다, 봄인데 봄이 아닌 것만 같아.
차에서 빗방울이 남기는 자국들을 구경한다. 흐려지고, 경계가 무너진 창 너머 풍경들 위로 작은 페인트 자국들이 떨어진다. 투명한, 하지만 그 너머의 색을 품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은 게을러도 되는 핑계가 적용된다. 어차피 집중이 안 되는 시간이잖아- 책을 읽을 수도, 글자 한 두 개를 있어나갈 수도 있건만, 부모님을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에는 죄책감 없는 게으름을 부린다. 추운 날씨에 몸이 움츠러들건만, 그래도 봄인가 보다. 이렇게 나른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해야 할 일 목록을 보고선 전원버튼을 누른다. 나는 지금 게으름을 부려도 되는 시간이니까. 테스트지 / 주말과제물 / 에세이 / 강아지 깔개 / 옷정리 /맞춤법 / 고전........ 며칠 내내 비슷한 목록들이 떠 있었기에 그 잠시의 마주침에도 할 일 목록들이 주르륵 머릿속으로 재생된다. 집중만 한다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조금만 서두르면 될 일들이 느린 손 위에서 한없이 느리게 진행되며 목록이 쌓여만 간다. 망상에 비슷한 생각들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지금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시간이야.
데리러 와 달라는 어머니의 전화벨이 울린다. 허가된 게으름의 시간이 끝날 시간이다. 봄의 나른함을 핑계로 조금만 더 이어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루정도만 할 일들을 미뤄도 좋으련만. 주말 출근의 존재가 게으름을 차단해 버린다. 봄인데 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빗소리를 벗 삼은 잠깐의 나들이로 아쉬움을 달래야지. 할 일들을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