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물과 교환한 수박 반찬

by 연하일휘

녹빛 껍질 안의 연두색 속살을 잘라낸 뒤에야 붉은 제 색이 드러난다. 수박을 썬다. 여동생은 요령껏 예쁘게 잘라 통 안에 담아두던데, 내 손으로는 되질 않는다. 적당히 듬성듬성 잘라낸 뒤, 통 안에 와르르 쏟아붓는다. 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니 입안 가득 붉은 과즙이 채워진다. 하지만 미미하게 풍기는 수박 향과 단맛이 실망스럽다. 조카의 울음과 교환해 온 올해의 첫 수박이다.


어머니가 1박 2일의 수학여행을 다녀오며 통영에서 꿀빵을 사 왔다.


"너는 한 박스 주면 너무 많잖아. 애기네 갖다 주고 나눠 먹어."


꿀빵 두 박스를 손에 쥔 동생은 너무 많다며 난색을 표한다. 집에 간식거리를 두면 있는 대로 다 먹어버리는 나로서는 넉넉히 챙겨갈 수가 없다. 그러다 여동생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조카를 보며 애정을 듬뿍 표하던 앞집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평소에도 간식이나 용돈을 챙겨 주려는 할아버지에게 조카가 제 아빠와 함께 꿀빵을 선물하러 집을 나선다.


집으로 돌아온 조카의 표정이 이상하다. 입가를 씰룩거리며 잔뜩 쳐져 있던 눈매가 금세 울음으로 바뀌어 버린다. 알록달록 예쁜 꿀빵을 맛도 못 보고 선물로 주려니 속상했던 모양이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서글프게 울던 조카는 남은 한 박스의 꿀빵을 손에 쥐어준 뒤에야 울음을 그쳤다. 그래도 안 주겠다며 고집부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착한지. 귀여운 울음의 이유에 다른 가족들은 모두 웃음이 터져버린다.


뒤이어 초인종이 울린다. 선물을 받은 앞집 할아버지가 고마움에 수박과 용돈을 챙겨주러 왔다. 아유, 안 이러셔도 되는데- 제부의 말에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던 할아버지는 떠넘기듯 선물을 건네주고 간다. 제부와 여동생의 표정이 다시 난감해진다. 어제 수박 한 통을 샀단다.


"나한테 나눔 해줘-"


그렇게 조카의 울음과 교환된 수박 반통이다.







그런데 큰일이다. 수박이 맛이 없어도 너무 없다. 달달하고 시원한 맛에 더울 때면, 달콤한 것이 끌릴 때면 한 두 조각씩 먹는 것이 제 맛인데, 손이 안 갈 듯하다. 스테비아를 톡톡 털어놓고 갈아서 먹어야 하려나. 문제는 매번 갈아먹는 것에 대한 귀찮음을 감수할 수 있느냐다. 이럴 땐, 더 잘 먹을 이에게 선물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엄마, 수박 먹을래?"


"아니. 별로 안 땡기는데."


"수박 받았는데, 애가 단 맛이 아예 없어."


"그거 된장에 찍어 먹으면 딱이겠네."


"나 된장 못 먹잖아......"


"........"


"낼 갖다 줄게~"


선물이 아니라 떠넘기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부모님 두 분 다 수박 반찬에 밥 먹는 것도 좋아하니, 안 먹을 음식은 아니라는 점에 나 혼자 위안을 삼는다. 어릴 적부터 여름이면 종종 수박이 밥반찬으로 밥상에 올라오곤 했었다. 수박 반 통을 식탁 한가운데에 올리고, 숟가락으로 퍼서는 된장에 찍어 먹는다. 남은 수박은 은박 호일로 톡 덮고서는 다음 끼니때까지 시원하게 냉장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된장을 못 먹는 나로서는 불만이 가득한 밥상이다. 식탁에 올라온 수박에는 손도 대지 않다, 뒤늦게 후식이나 간식으로만 슬그머니 손을 뻗는다. 요리조리 된장이 묻지 않은 부분을 파 내 먹지만, 이내 손댈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사라지고 만다. 툴툴거리다 이내 수박과는 거리를 두게 되어버렸다.


수박과 된장, 단짠단짠의 매력일까. 친구들 사이에서도 꽤 호불호가 갈리던 반찬이었다. 당연한 듯 여름이면 밥상에 올라왔었기에, 수박을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은 제주도 특유의 음식문화인 줄 알았건만, 남부지방 해녀들의 문화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제주도는 물질하는 이들이 많았던 덕분일까. 우리 집안에 해녀는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수박이 반찬으로 올라오곤 했다.


할머니도 더위에 식욕이 없을 때에도, 수박이 올라왔을 때만은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는 했었다. 그때마다 다른 밥반찬을 찾아 헤매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잔소리를 잔뜩 했었지만, 그 잔소리에 나는 잔뜩 틱틱대며 다투곤 했었지만. 유치하기만 했던 그 다툼이 작은 웃음이 되었다.


냉장고에 담아 둔 수박을 부모님 댁에 얼마나 갖다 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두 통 다? 아니면 한 통만? 다시 한 조각을 집어 먹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단맛에 더 이상 손이 가질 않는다. 엄마아빠, 미안해요. 이번만 좀 떠넘길게요. 결국 두 통을 다 꺼내 들고 만다.


Pixabay


[메인이미지 출처 : Pixabay]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쪼그만 녀석이 쪼그만 녀석을 안아주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