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이 트이는 시간
"나는 요새 '버나최' 재밌게 보는데."
"아, 그것도 재밌죠. 쌤, 이번에 '데못죽' 작가 다른 작품 나온 거 알아요?"
쉬는 시간, 복도에서 재잘거리는 대화가 펼쳐진다. 즐거움에 한껏 올라간 목소리는 조금 다급할 정도로 여러 작품들의 제목을 내뱉는다. 한 학생과 즐겨보는 웹툰과 웹소설에 대한 수다를 떠는 시간이다. 눈이 반짝거린다. 이 아이가 웹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푹 빠져있는 모양이다.
종종 수업 중 아이들이 지루해할 때면, 아이들의 관심사를 물어보곤 한다. 요즘 뭐가 인기 있는지, 어떤 노래가 좋은지, 유행하는 밈은 무엇인지. 확고한 취미를 가진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제 이야기를 펼치는 데 여념이 없다.
'오징어 게임'처럼 유명한 작품들이 대화 주제로 오를 때면,
"야, 그거 19금인데?"
"에이, 부모님이랑 보면 괜찮잖아요."
라며 능글맞게 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한동안은 '최애의 아이'라는 작품이 유행하며, 아이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지곤 했었다. 평소 애니메이션을 안 보던 아이들도 그 작품은 봤다며, 소수가 아닌 다수와의 덕질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었다.
"나는 내 최애가 1화에서 죽어서 더 안 봤어."
"쌤 최애는 늘 빨리 죽잖아요."
* 최애 : 최고로 애정하는 대상
기억력도 좋다. 가끔 '덕토크'(덕질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툭툭 내뱉었던 말들을 어찌 기억하는지,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도 줄줄 읊는 녀석도 있다.
*덕질 :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아이들과의 덕토크를 즐기는 편이다. 물론 내가 관심이 없는 분야는 활발하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지만, 수업 중 축 늘어져 있던 아이들의 활기를 되살려줄 가장 좋은 소재인 덕분이다.
"공부할 때, 덕질은 필요해. 스트레스받을 때, 내 최애 얼굴 한 번 보면 기분 좋아지잖아."
애니메이션, 웹소설, 드라마, 영화, 아이돌 등. 분야를 불문하고 덕질 하나쯤을 추천한다. 공부의 가장 큰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방안인 것을 아는 까닭이다. 내가 그랬었다. 직접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작품을 찾아보기도 하고, 공부하는 틈틈이 숨통을 트여준 것은 덕질이었다. 운동이나 악기 연주 등 다른 취미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하나쯤 덕질을 하고, 최애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덕질을 추천하기도 했었다.
아이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던 중 한 학생이 최근 빠져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이세계 아이돌', 새로운 애니메이션인가? 처음 듣는 이름에 건성건성 대답을 하는 내게 학생이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쌤, 대화를 할 땐 집중하셔야죠."
옆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제대로 된 호응이 없으니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제야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니,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그래, 가끔은 그런 낙이 필요하지.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학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쌤이랑 덕토크가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너 1학년때도 같이 덕토크했었잖아. 근데, 네가 공부는 안 하고 덕질만 하길래 더 말 안 꺼냈었지."
"그랬어요?"
"응. 요새 너 열심히 공부하니까 같이 수다 떠는 거야."
취미공유도 좋지만, 결국은 공부하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관계다. 어쩔 수 없지, 학원은 공부하러. 그리고 쌤은 너네 공부시키러 오는 거니까. 그래도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 아이들을 슬쩍 살펴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나를 슬그머니 불러올 수 있는 시간.
"아, 쌤. 그럼 그 웹툰은 커플링 누구 밀어요?"
말문이 막힌다. 아, 그 웹툰에서도 커플링을 짜서 제2창작으로 이어지는 활동이 활발했구나. 어릴 적이면 모를까, 요즘에는 그 정도로까지 작품에 빠져든 적이 없어 생각한 적이 없었다. 힘겨움에 우울에 빠져드는 날이면 최애를 찾아보며 마음을 풀기도 했었는데. 이젠 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보네.
미안하다. 쌤이 10년 전이었으면 했겠는데, 요즘은 그 정도까지 빠져들지는 않아.
[대문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