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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아닌 일상

그 언젠가의 기억

by 연하일휘

비가 내린 흔적이 남아있다. 검게 물든 아스팔트 가장자리엔 주차의 흔적이 하얗게 남아 내가 없던 시간을 보여준다. 여전히 굽 아래에 빠드득- 짙은 발자국을 남기던 눈길의 느낌이 느껴지는데, 내 발 아래엔 그저 빗물에 젖은 바닥일 뿐이다.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분명 그 여행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그 여운이 지워지지 않는다.

휴가를 맞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으로 마주 나온 친구와 놀라움과 반가움의 회포를 푸는 것도 잠시, 이미 하얗게 쌓인 눈에 잔뜩 몸을 움츠린다. 분명 떠나기 전에는 파란 하늘 아래였는데, 회색으로 물든 하늘에서는 굵은 함박눈이 옷 위로 내려앉는다.

"눈은 내리지만 많이 춥지 않아 다행이야."

영하로 떨어지던 날씨가 영상으로 올라왔다.

한참을 내리던 눈이 세상을 가득 메워 외출이 어려워졌지만, 여의치 않았다. 가고 싶었던 곳이 어디냐는 친구의 물음에도 그저 "네 얼굴 보러 가는 건데 뭐."라는 답변을 했던 나였다.

오랜만의 만남에 지어진 함박웃음이 가실 무렵, 결혼을 앞둔 친구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결혼 스트레스는 괜찮냐는 물음에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던 친구와 함께 집 앞의 카페로 향했다. 10년이 훌쩍 넘은 긴 연애 기간 동안, 초창기부터 남자친구. 아니 이제는 예랑, 예비신랑과 함께 다녔다는 카페였다.





친구의 피곤했던 얼굴은 결혼 스트레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시험기간이 되며 바쁘다는 핑계로 띄엄띄엄 이어지던 내 연락에, 친구는 홀로 속앓이를 많이 했었던 모양이다. 일을 하며 만났던 이들에 대해서, 그 관계 속에서 힘겨웠던 이야기들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과 미안함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주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미안함에 건넨 말에 친구는 너도 힘들지 않았냐는 말을 되돌려 준다.


무계획적인 만남이었지만, 하얗게 물든 세상은 선택지를 더 좁혀버렸다.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기도 힘든, 솔직히 말하자면 이 눈을 헤치고 밖을 나서는 귀찮음은 감수하기에는 나와 내 친구는 성격이 너무나 잘 맞았다. 가볍게 집밥을 먹고, 프리랜서인 친구의 일을 돕는다. 며칠 전 마감이 끝난 줄 알았건만, 새로운 마감에 끊임없이 물건을 포장하는 친구를 따라 손을 놀린다.


"나 일당 받아가야 하는 거 아냐?"


서로 큭큭대며 잡담을 주고받다 친구의 슬리퍼를 끌고 마트로 향한다. 무알콜 맥주 두 캔과 쥐포 하나를 사 들고선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시답잖은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새어 나온다. 그러다 하품 몇 번, 피곤함에 져 잠자리로 들어선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전의 우리였다면 긴 헤어짐 끝에 만남을 기뻐하며 짧은 새벽을 함께 보냈을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것들에 함께 깔깔거리면서, 길지 않은 만남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다 아침을 맞이했을는지도 모른다. 나와 친구는 '오랜만'이라는 수식어를 단 만남이었지만, 아직 어렸던 학생이던 시절처럼, 마치 어제까지도 시간을 함께 보냈던 것처럼, '익숙한' 만남이었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카페에 가고, 함께 밥을 차려 먹고, 마트에서 가벼운 주전부리를 사 먹으면서. 그저 친구의 일상에 내가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갔고, 그저 친구의 일상이 내게 스며들었던 시간이었다. 처음 접하는 시간들이, 처음 가 본 장소들이 평소와 같은 일상처럼 다가온다. 그건 네가 이미 내 인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더 쉽게 네 일상에 스며든 것이었을까.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잔뜩 부은 얼굴로 "잘 잤어?"라는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는 아침. 짧디 짧았던 하나의 일상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휴가를 맞이하며 2박 3일이라는 짧은 여행을 기획하며, 단 두 사람에게만 연락을 했었다. 제주도에 머무르는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리고 만나고 싶었던 두 사람과의 만남만을 준비했었다.


신혼 가전을 보러 간다던 친구와 머리를 말리며, 로션을 바르며 고요했던 거실에 잔뜩 목소리들을 새겨 놓는다. 단 하루였던, 새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려니 아쉬움이 발자국마다 묻어난다.


"다음에 올라올 땐, 너 신혼집 들어갔을 때인데. 쳐들어가도 되나?"


너라면 언제든지 재워주지- 애정 어린 친구의 목소리와 함께 집을 나선다. 다른 만남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다. 약간의 두근거림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함께 걷는 친구의 익숙함을 떠나보내기 싫은 시간. '행복하다'라는 표현보다는, '편안해서 좋았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을 너와 함께한 1박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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